흐림
아침부터 피곤하다. 마음이 매우 흐리다.
잠들 기 전 망상이 꿈으로 이어져 모 영화배우와 사귀는 꿈을 꿨기 때문이다.
그럼 기분이 좋아야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현실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니까,
망상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오기가 영 쉽지 않은 거다.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고...... 5분 정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망상모드에서 현실모드로 스위치를 눌러놓고 예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이지 망상을 멈출 수가 없다. 은밀한 취미.
나의 대외적 취미는 독서나 음악감상이지맘
사실 나의 솔직한 취미는 망상이다.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 살림하고 애들 챙기고 그러다가 밤에 자려고 누우면 너어무 피곤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만히 누워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망상 밖에 없으니 그런 것 같다.
대충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망상질을 시작했는데
처음엔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고 망상하며 행동을 했다.
마치 내가 배우가 된 것처럼, 나의 팬들이 나의 일상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처럼.
낮에는 그렇게 누가 보는 것처럼 망상하며 행동하고,
밤에는 현실과 동 떨어진 미래를 꿈꿨다.
나는 내가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만큼 망상에 빠져 살았다.
겉으로 나의 현실은 평범하다. 평범한 딸로 자랐고, 평범한 직업을 가졌고 평범한 아내, 평범한 엄마다.
그저 내 머릿속만, 휘황찬란한 망상들이 가득 채우고 있는 거다.
아무도 모른다.
터무니 없는 망상들,
그 중에서도 절절한 사랑의 주인공이라든가, 재벌급 자산의 보유자라든가, 미모의 마피아가 된다거나 하는
오그라들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오를만한 망상들은 단 한번도 입 밖에 내놓은 적이 없다.
가끔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늙어서 치매라도 오면 가족들이나 요양보호사를 붙잡고 이런 나의 망상들이 쏟아낼까봐,
환자복을 입고 망상 속의 나처럼 행동할까봐.
평생 비슷한 망상들을 매일 밤 머릿 속에서 반복하며 잠드니 가능성이 낮은 일도 아니다.
내 망상들은 아주 뿌리가 깊다.
MBTI 열풍이 일고 E(외향형)과 I(내향형) 의 차이나,
J(계획형)과 P(즉흥형) 의 차이에 대해서는 많이 읽고 끄덕거리기도 했지만
N(직관형)과 S(감각형) 의 차이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 밤새 망상 속을 헤매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덮은 낡은 이불의 감촉과 함께 다시 월요일 출근해야 하는 현실로 돌아오려니 갑자기......
아, 나는 정말 N이구나! 극강의 N이구나! N이라서 그랬구나!
싶은 순간들이 우르르,
짚으로 된 줄에 조기를 꿰듯이 착착착착 하나로 엮이기 시작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
타인의 표정이나 말투 그 자체보다는 이면의 의도 같은 속 마음에 대해 상상하는 것.
작은 쿵 소리에도 태풍인가, 지진인가, 누가 부딪혔나, 뭐가 떨어졌나 별의별 경우의 수를 떠올리는 것.
밤마다 누워서 이불의 감촉 같은 감각보다는 오만가지 망상에 더 집중하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은 외우지도 못하기에 무조건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외워지는 것,
그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말도 되지 않는 상상들을 하는 것. 예를 들면 beautiful 아름다워, 비유view=beau 가 티ti나게 아름다워 full 아름다움이 충만해 하면서 푸르른 들판을 떠올리는 식.
빵만 봐도 맛 보다는 그걸 함께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망상하고,
카페에 가도 어떤 드라마나 영화가 그 분위기에 어울릴지 떠올려보는 것.
배우의 눈매 보다는 눈빛으로 서사를 만들어보려는 시도.
지금도 소박한 일터에 출근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머리 속으로는 벚꽃이 만개한 산사, 평일 오전의 한적한 쇼핑몰, 재즈가 흘러나오는 카페, 강남 테헤란로 고층 건물 로비 등등을 종횡무진 왔다갔다 하고 있다는 것.
약간의 불안증과 강박, 만성피로도 확실히 NBTI-N 성향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늘 머릿속에 가지가지 생각들이 떠오르니 당연히 불안하고,
그 불안을 없애려고 여러 대책들을 세워야 하니까 항상 내적으로 분주할 수밖에.
겉으로 평온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들기는 이 순간에도 미간이 찔끔질끔, 눈썹 끝이 파르르 떨린다.
피곤한 월요일,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N이 아닌 S인간들은 이런 현실 자각 타임 없이 현재에 충실하고 행복할까?
I에서 E로 노력할 생각은 없다.
J에서 P로는 노력해서 바뀌었다. 여행을 가더라도 더 이상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숙소까지만, 끝.
식당이나 들를 곳은 여행 당일 아침 컨디션에 따라 정한다.
마음을 다듬고 또 다듬어 겨우 그렇게 바꿨다. 그랬더니 예전보다는 불안이 조금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제, N에서 S로도 노력을 해볼까 싶다.
망상 다이어트,
지금 이 순간 감각들에 충실하기,
다음 단계를 생각하지 않기.
그래, 이렇게 세 가지를 올해 상반기 인생 목표로 잡아본다.
언제나 행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