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림
예쁘려면 시선이 확 꽂힐 정도로 예쁘든가,
아니면 평범하든가.
어설프게 예쁜 건 정말 최악인 것 같다.
차라리 못 생기면 기대가 없다. 세상이 나에게 친절할 거라는 기대 말이다.
어설프게 예쁘니 세상에 대한 기대가 본의 아니게 차곡차곡 쌓이는데,
예쁜 게 아니라 어설프게 예쁜 거니까 기대가 10이라면 5는 빗나가고 만다.
그리고 상처 받는다.
내가 그렇다.
좀 어설프게 예쁘다.
예전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남학생들이 나를 보며 그랬다.
쌤, 멀리서 보면 존나 이뻐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
얼핏 보면 예쁘다는 소리지.
원인이야 좁쌀 가득한 피부일 수도 있고, 어딘가 빗나간 신체 비율일 수도 있고,
돌출된 안구일수도, 자글자글한 입술 주름일 수도 있지만 현 시점에 딱히 분석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오늘도 비가 내리고,
스스로 성찰하는 글을 끄적이며 불안을 다스려볼까 한다.
스스로 어설프게 '예쁘다'고 판단하게 된 계기들은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출근길 전철에서부터 연락처를 물으며 쫓아왔던 남자,
연예인 생각있냐며 중학생이던 내게 명함을 내밀었던 남자,
그 외에도 나 좋다고 했던 몇몇 남자들.
그때야 내가 정말 예뻐서 이것들이 날 귀찮게 하네 싶었다.
지금은 안다.
그들은 사기꾼이었을수도, 맹해보이는 날 이용해먹으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아주 못 생겼으면 그런 기억들이 아예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스스로 '어설프게' 예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거다.
이게 최악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충 세 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다.
첫째, 스스로 예쁘다는 착각을 종종하다가 망신을 당한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 업체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거래처 사람이 "어머, 누가 애 둘 낳은 아줌마로 보겠어요. 20대 같으세요!" 라고 말을 하기에 "아니에요^^" 하며 미소 지었는데,
알고 보니 내 옆에 앉았던 직원에게 한 말이었다.
어쩐지 아니에요^^ 할 때 다들 약간 당황한 표정들이더라니......
졸지에 누구 예쁘다고 칭찬하는데 훅 끼어들어서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상한 여자가 되었다.
둘째, 쓸데없이 여자들의 시기와 경계심의 대상이 된다.
어설프지만 어쨌든 조금 예쁘다보니 대충 여자 열명 정도가 모인 곳에 가면 그중 한둘은 꼭 나를 부러워하고 경계하는 게 느껴진다. 나는 키가 큰 편이고 목이 길고 뼈대가 가는데 주로 키가 작고 통통한 여자들이 그렇다.
색이 쨍한 가디건을 입거나 좀 독특한 디자인의 가방을 들거나,
혹은 긴 목이 돋보이는 목걸이만 해도 대놓고 어디서 샀냐 물어보지는 않고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다음 날 비슷한 스타일의 패션을 시도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리고 괜히 시비를 건다. 예컨데 남자 상사가 나에게 조금 친절하면 어머! 너무 윤성씨만 예뻐하시는 거 아니에요? 류의 날선 말들을 농담이랍시고 던진다든가 하는,
묘한 기류가 있다.
중학교 때는 괜히 시비걸고 조롱하던 같은 반 애가 하나 있었는데
대뜸 졸업식 때 손으로 적은 편지를 건넸었다.
- 네가 예쁘고 연약해보여서 질투 나서 그랬어. 미안.
정말 피곤하다.
예쁠 거면 확 예뻐서 한류 top 배우나 되었을 텐데 괜히 어설프게 예쁘장해가지고는.
번외로 나는 키가 작고 통통한, 귀여운 스타일의 여자들이 부럽다.
Small girl fantasy.
셋째, 이건 나이가 들면서 더 실감나는 건데....
과거 어설프게 예뻐서 누렸(?)던 세상의 친절에 익숙해진 채 늙어가는 거다.
나이가 들수록 어설프게 "예쁜" 애 에서 "어설프게" 예쁜 아줌마로 변신하는 느낌이랄까?
마흔이 넘으니 이제 예쁘장하다기 보다는 어릴 때 예쁘장했겠네 싶은,
그러니까 예쁨이 살짝 스친 자글자글한 중년이 되었는데
나의 마음은 아직 늙은 외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어설프지만 예쁘장했던 어린 시절, 사람들은 내게 비교적 친절했다.
아르바이트 면접에 가서 대답을 버벅거려도 생글생글 웃기만 하면 뽑혔고,
일을 못해도 생글생글 웃기만 하면 허허 손님도 사장도 나의 실수들을 용서해주었다.
이제 아니다.
실수하면 멍청이 소리를 듣고,
생글생글 웃으면 눈가 주름이 자글자글 잡혀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일 뿐 아무도 내게 친절하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제 버릇 개를 못 주고 여전히 나는 애쓰며 다닌다.
업무 협조를 받으려 굽신굽신 더 이상 예쁘지 않은 미소를 짓고,
식당에서 계란찜 서비스를 받으려 자글자글한 얼굴을 더 구겨 웃는 얼굴을 애써 만든다.
이게 다 어설프게 예쁜 얼굴 때문이다.
어설프게 예쁜 외모가 만든 빌어먹을 습관 때문이다.
창 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LED등을 조명으로 거울 속 나를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피부는 누렇고 푸석푸석하다.
눈가 주름은 자글자글하고 눈밑은 푹 꺼졌다.
팔자주름도 스물스물 자리를 잡았고, 입술은 똥구명처럼 쪼글쪼글한 상태.
목에도 어느새 가로 주름이 좍좍 늘었다.
덮자.
거울을 덮는다.
내면에 충실해야지.
이너뷰티.
몸뚱이가 아니라 정신을 맑게 깨끗하게 자신있게 다듬어야지, 다짐해본다.
따뜻한 인상의 늙은 아줌마를 목표로.
아니, 늙었지만 인상이 따뜻한 아줌마를 목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