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거리를 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앞 모퉁이에서 웬 할머니께서 나를 붙잡으시더니 관리실이 어디냐고 물으셨다. 107동을 지나서 놀이터 뒤편 지하에 있다고 말씀드리니 한숨을 푹 쉬셨다. 도대체 어떻게 찾아가냐는 표정이셨다. 이어서 핸드폰을 빌려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별별 일이 발생하는 세상이라 핸드폰을 빌려드려야 할지 순간 머뭇거려졌다.
할머니는 손녀와 잠깐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인데, 한참 헤매어 보아도 어디가 딸네 집인지 찾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그제야 할머니 손을 잡고 서 있는 네 살쯤 돼 보이는 양갈래를 한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의 지친 눈빛도. 스스럼없이 할머니께 핸드폰을 건네드렸다.
할머니는 딸에게 전화를 하셨다. 그래도 딸 번호는 기억하고 계신 게 천만다행이었다. 따님이 불러 준 출입구는 바로 우리 집 출입구였다. 10*동 3~4호 라인.
"할머니, 저의 집과 같은 라인이세요. 같이 가세요."
"아이고~ 여길 가봐도, 저길 가봐도 못 찾겠더라고요~ 식은땀이 어찌나 나던지."
"그쵸~ 저도 처음 여기 왔을 때 아파트가 다 똑같아 보여서 한창 헤맸어요. 찾기 힘들어요. 정말."
순간 매한가지 모양으로 쭉쭉 솟은 아파트들이 원망스러웠다. 할머니의 애씀과 탈탈 털린 영혼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나의 미래모습처럼 느껴지면서. 심각한 방향치와 길치인 나는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서 원래 장소를 찾지 못해 한참 헤매곤 한다. 낯선 공간에서 나올 때마다 애를 먹고, 반대 방향으로 가는 나를 아이들이 붙잡을 때가 많다. 그래서 할머니를 더욱 안심시켜드리고 싶었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할머니와 어린 여자아이를 이끌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따님 집은 45층이라고 하셨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둘이 나란히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가뿐한 기분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아까 전화통화했던 할머니 딸인데요. 우리 엄마 어디로 가셨어요? 기다려봐도 안 오셔서요."
"10*동 3,4호 라인으로 들어가셨는데요. 제가 엘리베이터까지 모셔다 드리고 올라가시는 거 확인했어요."
"거기 호***** 아파트 맞아요?"
"아니요.... 여기 랜******** 아파트인데요!!"
아뿔싸. 할머니 딸의 집은 길 건너편 아파트 10*동이었다. 곧바로 밖으로 나가서 엘리베이터 카메라 화면을 들여다보아도 둘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남의 집 벨을 누르고 또 멘탈이 붕괴되실 할머니가 걱정되었다. 놓칠세라 한참을 들여다보니 한참 후 할머니와 손녀가 나타났다. 손녀를 잡은 할머니 손의 식은땀이 보이는 듯했다.
한층 낯빛이 어두워진 할머니와 손녀가 내렸다. 할머니께 이곳은 랜******** 아파트이고 길 건너편이 따님 아파트라고 말씀드렸다. 이제 따님이 데리러 올 거라고, 안심하시라고 했다. 밖으로 모시고 가려는 순간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얘가 오줌이 급하대요.. 이를 어쩌나.."
땀방울이 송송 맺힌 어린아이가 보였다. 집까지 가려면 또 한참 걸릴 텐데. 할머니께 우리 집이 1층이니 금방 손녀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따님과 엇갈리지도 모르니 밖에 계시라고 말씀드렸다.
현관 앞 화장실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늘 그렇듯 천연덕스럽게 마중 나온 우리 집 고양이를 보고 아이가 갑자기 딸꾹질을 시작했다. 아이가 소변이 급한 상황이더라도 남의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게 요즘 시대에 맞는 행동인가? 순간 혼란스러웠다.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몇 살이냐 물어보며 안심시켜 밖으로 나왔다.
"밖에 따님이 오실 거예요. 어서 가세요" 할머니께 바깥으로 가시라고 손짓했다. 할머니와 손녀를 바로 따라갈 참이었다. 멀리서 원피스를 입은 30대 초반쯤 보이는 젊은 여성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할머니 따님이신가 보네. 에고~ 다행이네....' 한시름 놓던 순간..... 날카롭고 째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정신을 엇다 두고 다니는 거야! 제정신이야?!!" 딸이 엄마를 향해 외치는 소리였다. 분간할 수 없는 말이 이어졌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황급히 돌아서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동안 멍하니 앉았다.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질 할머니가 눈에 밟혔다. 걱정이 태산이었을 따님의 마음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통화할 때 아파트 이름을 묻게 할걸. 아이를 집에 데려갈 때 아이 엄마에게 미리 알렸어야 했나? 나의 판단과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좀 더 잘할걸. 가슴에 조그만 가시가 하나 걸린 듯 불편한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