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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의 추억

관계 속에 피어나는 온기

by 하루향기




출근을 하자마자 동료 직원이 내일 여사님께서 백숙을 만들어주실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이건 또 뭔 일인지. 직장에서 굳이 왜 번거롭게? 사 먹으면 되지 않을까? 내가 하는 것도 아닌데 귀찮은 마음이 솟구쳤다. 시어머니께서 주말 아침에 정월대보름이니 오곡밥을 먹으러 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은 기분과도 비슷했다. 식구나 많은 부서라 호불호가 갈릴 텐데, 또 직장에서 만들어 먹는 건 맞는 건지? 예상되는 잡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마침 여사님께서 사무실로 들어오시며 내일 백숙을 만들어 먹는 게 괜찮은지 물어보셨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일까? 예전보다 부쩍 솔직해진다. 여사님께서 너무 힘드시지 않겠냐고, 사실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고 말씀드렸다. 여사님은 정말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며 다 알아서 할 거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 여사님도 하루 이틀 생각하신 게 아닐 터라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분위기였다.


우리 여사님은 참 특별한 분이시다. 늘 직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신다. 옥수수, 토마토, 떡, 다슬기 등등. 하필 나를 제외하고는 식탐이 없는 직원들이 모여 있어서 애써 갖고 오신 음식을 다 비우지 못할 때가 많다. 여사님은 남은 음식을 보며 안타까워하시고 실망하면서도 나눔을 포기하시지 않으신다. 심지어 입에 넣어주실 때도 있다. 혼자 살고 계셔서 외로우신 걸까? 직원들을 가족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정성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말복 당일,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시는 여사님께 여쭈어보았다. "안 힘드세요?"

여사님은, "힘들긴~ 내가 재밌어서 하는 건데. 맛있게 먹어주면 그걸로 된 거야."


드디어 백숙 한 그릇이 눈앞에 나타났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국물을 맛보니 매우 깔끔하고 개운했다. 친정 엄마의 백숙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여사님께 어떻게 만드신 거냐고 여쭤보니, 닭발로 국물을 내고 강원도에서 공수해 온 영지버섯과 갖은 한약재를 넣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수라상에 올림 직한 레시피였다.


호응도 별로 없는 직원들을 위해 온갖 정성을 넣어주신 마음이 너무 감사하고 죄송스럽기도 했다. 처음 느껴보는 백숙 맛에 이끌려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직장에서 이런 대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드는 순간 가슴 안에서 뜨뜻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제주에서 올라올 때는 서로 주고받는 것 없이 나만, 우리 가족만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했었다. 제주라는 공간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늘 둘러싸여 있었고, 어딜 가나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인 게 좋을 때도 있지만 가끔 부담스러웠기에 홀로서기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타향살이를 해보니,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란 걸 깨닫는다. 손끝이 시린 날 쭉쭉 솟은 아파트 숲을 걸을 때 이 많은 집 중에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시려오고, 길을 걸어가다 아는 사람인 것 같아 쳐다보면 역시나 닮은 사람일 뿐일 때 그리움이 일렁이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따뜻한 정을 많이도 받았다. 조건 없이 베풀어주는 분이 늘 주위에 계셔서 외로움을 그다지 못 느끼고 살고 있다. 먼저 손 내밀어 주시는 분들 덕에 그 공간에는 숨통이 트이고 따뜻한 바람이 일어나고 온기가 돈다. 그분들이 주신 직접 재배한 채소와 손수 담근 김치를 먹었을 땐 뭔가 다른 특별한 맛이 난다. 주고받는 번거로움 속에 온기가 흐른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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