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중한 어머니
지난 주말에 어머니께서 제주에서 올라오셨다. 어머니 덕분에 살림에서 잠시 해방되어 호시절을 보내고 있다. 너저분했던 우리 집은 모처럼 빛이 나고 조급한 마음에 내질렀던 소음도 사라졌다.
누군가는 의아한 듯 묻는다. 시어머니인데 어떻게 편하냐고? 나를 안쓰럽게 보기도 한다. 물론 처음부터 편하진 않았지. 남편에게 사랑이 지대하셨던 어머니가 껄끄럽고, 꼼꼼함도, 세심한 배려도 부담스러웠다. 나만의 영역이 소중하고 애교도 없는 며느리라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났고 어머니께서 아이를 봐주셨다. 어머니께서 우리 집으로 오시면 내가 출근하고, 내가 퇴근하고 나서야 어머니도 귀가하시며 매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일하느라 바쁜 아들과 며느리를 안쓰러워하셨고 아이들을 예뻐하셔서 열성적으로 도와주셨다.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의 컨디션이 좋고 나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매일 만나는 게 피곤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아무 뜻 없이 한 말에도 바짝 신경이 곤두섰다. 깔끔한 스타일도 부담스러웠다. 나라면 지나쳤을 공간도 어머니는 쓸고 닦으셨다. 남편 속옷 하나가 없어졌다며 찾으시는, 나와는 정말 다른 캐릭터이셨다. 어머니도 깔끔하지 못하고 허술한 내가 못마땅하셨을 것 같다. 여러모로 적응이 필요했다.
그런데, 함께 한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께서 옆에 계신 게 자연스러워졌다. 어머니는 나의 빈틈을 용케도 아시고 채워주셨다. 몇 년 후에는 어머니께 스스럼없이 물었다.
"어머니, 제 여권 보셨어요?"
"어머니, 제사가 언제예요?"
남편은 직장 특성상 집을 많이 비웠는데 그 자리를 어머니께서 메꿔주셨다. 아이들 행사가 있을 때도, 아이들이 아플 때도 늘 함께 해주셨다. 아이들 문제로 속을 끓을 때 함께 걱정해 주시고, 기쁜 일이 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해주셨다.
우리는 점점 육아동지가 되어갔다.
큰 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 어머니께서 더 이상 우리 집으로 출근을 못 하시게 되었다. 아이를 봐주시다 귀가하는 길에 넘어지셨는데 고관절이 부러져 큰 수술을 받으셨다.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아침마다 아이들 학교 보내느라 전쟁이 시작되었고, 집안일을 하다가 남편과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몇 개월 후 퇴원하신 어머니는, 예전처럼 매일 우리 집으로 오실 수 없으셨다. 할머니와 애틋한 사이인 아이들은 주말마다 할머니집에 가서 하룻밤을 묵고 왔다.
이후 남편의 본청 발령으로 우리 가족은 인천으로 오게 되었다. 올라오는 비행기 안에서 난데없이 눈시울이 붉어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손자손녀가 전부인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가실지 마음이 아려오고, 늘 옆에 계셨던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왔다. 아이들 문제로 속이 곪아터질 때, 남편과는 의견이 맞지 않을 때, 누구에게 털어놓아야 할까? 새로운 곳에서 일과 살림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나이 마흔이 돼서야 비로소 나는 진정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계절에 한번 올라오셔서 2주쯤 머무르다 가신다. 예전에 그랬듯 어머니께서는 청소를 하시고 나는 요리를 한다. 평소보다 식탁은 풍성해지고, 집안은 빛이 나고, 들리지 않던 가요무대 노랫소리와 드라마 대사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진다. 아이들이 며느리가 시어머니 앞에서 맥주도 마시고 편히 쉰다고 농담을 하면, 어머니는 뭐가 어떻냐고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내 편을 들어주신다. 남편이 아이를 다그치면 우리는 한편이 되어 쏘아붙인다.
남의 편(남편)의 인연으로 만났지만 시간 속에 다듬고 다듬어져 어머니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부담스러웠던 어머니의 일편단심형 사랑이 어머니가 가진 본연의 향기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그 사랑을 아이들이 온전히 받고 커서 참 감사하다. 어머니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오래오래 반복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