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작은 아이

by 레몬향품은

고등학교 3학년. 맨 앞 줄에 앉은키 작은 아이.

첫 수업이 시작되고 초록색 칠판에 쓰인 글들을 연필로 필기를 하다가 글씨가 틀려서 지우개를 찾는다.

키 작은 아이가 가지고 있는 필통엔 연필 몇 자루뿐 지우개가 없다.

안절부절못하던 아이는 뒷자리에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건넨다.


말이 많이 없고 웃으며 대답하는 마음씨 착한 그 친구가 썩 마음에 든 키 작은 아이는 수업이 끝난 후 질문을 한다.

“이름이 뭐야? 사이좋게 지내자”

“응”


여전히 짧은 대답으로 일관하며 웃는 친구가 좋았다.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고 집에도 놀러 가고, 많은 얘기를 하진 않았지만,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좋았다.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웠던 키 작은 아이에게 친구는 매우 고마운 존재였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만난 두 아이는 서로 의지하면서 지냈다.


가정의 불화가 심했던 키 작은 아이에게 심하게 찾아온 사춘기로 집을 들어가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우리 집 가서 잘래?

"그래도 돼? 부모님 안 계셔?"

친구들 사이에선 당당하고 자존감 높아 보이는 아이였지만,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하고, 어른들을 무서워하던 키 작은 아이는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그런 아이의 성격을 알아 차린 것인지, 친구는 두 말 없이 자기의 방을 내어 주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고, 관심을 가져 주었다.

키 작은 아이는 감동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언젠가 내가 성공하면 이 친구의 도움을 잊지 않을 거야, 꼭 보답을 해 줘야지.’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오해가 쌓이고, 질투의 대상이 되었을 때도 , 키 작은 아이는 고마웠던 친구를 잊지 않았다.


둘의 우정은 영원할 줄 알았다.

청년기가 되어서 각자 다른 직장을 다니다가 둘 다 실직을 하고, 키 작은 아이의 권유로 우연히 같은 직장에서 알바를 하게 되었다. 키 작은 아이에겐 익숙한 일이었지만, 낯선 환경에서 일을 처음 하게 된 조용한 아이는 서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성격 급한 키 작은 아이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서울로 출장을 같이 가게 된 3개월 동안, 타인으로 인해 서로의 대한 불신이 생기고, 신뢰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할 때도, 키 작은 아이는 의심하지 않았고, 친구를 험담하는 분위기에서도 키 작은 아이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 친구의 고운 심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장 이후,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오해는 더 높아지고,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들이 많이 쌓이게 되었을 때에도 키 작은 아이에겐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마음 한편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했지만, 현재에 집중하고 살아야 했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건.

암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불안함과 슬픔에 잠겨 우울감까지도 심하게 온 키 작은 아이에게 문자가 왔다.

그동안 내게 빌려준 돈을 돌려 달라는 문자였다.

'맞다. 난 그 친구에게 돈을 빌렸었다. 우울감으로 직장을 다닐 수 없어서 생활고에 시달려서 조금씩 돈을 빌렸었다. 잊고 있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살아내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로 나는 내가 도움 받은 것을 잊고 있었다.


'분명, 내가 잘 못한 일이다.'

그러나, 서운했다. 몇 해 만에 연락 와서 돈 달라는 얘기라니...

그 친구가 이렇게 할 땐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근 결혼했다는 소식을 주위 친구들에게 들었다.

생활이 많이 힘든 상황이 아니라면 친구에게 이렇게 모질게 얘기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가 키 작은 아이에게 무심코 던진 문자는 정말 충격적이고, 상심이 컸다.

절친한 친구사이더라도 넘어선 안 된 선을 넘은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 수가 있구나!

아무리 세월의 풍파를 세게 맞았다 하더라도 어쩜 그렇게도 모질게 맞았을까!

누구보다 착하고 순하고 정 많았던 사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학창 시절과 청년 시절에 힘들게 지내면서 돈을 빌리고 못 갚긴 했었지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 찢기도록 모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단 것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랄까.


물론, 내가 잘 못한 일인건 분명한 사실이다.

힘든 일이 있어서 빌려줬던 돈이 생각이 났을 것이고, 바쁜 상황에서 연락하느라고 거칠게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15년 우정이 그 친구에겐 우정이 아니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누구보다 그 친구를 위하는 사람은 키 작은 아이일 거라 믿었다.

마음으로 행동으로 말로.. 그 친구를 험담하는 사람들에겐 아니라고 반문했고, 옳은 길이 아닌 길을 가려고 할 때엔, 마음은 아프지만 그 길은 아니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여겼었고, 실직하고 있을 때도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큰 만큼 상처도 큰 법.

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 본 키 작은 아이였지만, 친구에게 배신당한 이런 기분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가 않았다.

세상에 믿지 못할 것이 사람 마음이라지만, 이리도 쉽게 허물어지는 사이였단 것이 마음 아팠다.


미련 없이 너를 보낸다. 잘 가라 내 청소년기와 함께.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의 청소년기와 청년기여 안녕.

사랑에 굶주렸던, 사랑의 목말랐던, 젊은 시절의 추억들을 모두 날려 버린 그날이, 키 작은 아이의 삶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시련 속에서 키 작은 아이는 결심한다.

두 번 다시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겠노라고.

다신, 정이라는 것에 흔들리지 않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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