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을 Sep 28. 2023

외야청청 피구왕


아침 7시, 6학년 아들을 깨우기 위해 소리친다. “외야~~”. 아침잠이 많은 아들이 벌떡 일어난다. 둘째는 어젯밤 말했다. “엄마, 내일 아침 저 깨울 때 ‘외야’라고 외쳐주세요. 그럼 일어날게요.” 그래서 그런 거지, 미친 게 아니다.


외야란? 피구는 내야와 외야로 나뉜다. 한 팀 12명의 선수 중 11명이 내야, 단 한 공격수만이 경기장 바깥 외야에서 경기를 시작한다. 그 핵심 공격수를 외야라고 부른다. 야구에선 투수가 승패에 절대적이라면 피구에선 외야가 알파와 오메가이다. 상대팀을 올킬한다면 우리팀 내야 11명을 그대로 둔 채 홀로 바깥에서 경기를 마칠 수도 있다. 


둘째는 피구에 몰입한 지 1년 만에 드디어 외야가 되었다. 외야 지존이라기보다 팀플의 선두주자라 하겠다. 내야의 핵심 공수 만능들과 공을 주고받는 팀플이 이 팀의 주전략이다. 때로 피지컬이 고등학생급인 파워풀한 외야는 혼자서 상대 내야를 올킬하기도 했지만 학교 규모가 작은지라 압도적인 외야는 탄생하지 않았다.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피구를 막 시작하던 5학년 초,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어머니, 얘는 솔직히 동생보다 움직임이 둔해요. 그래도 열심히 해요.” 나는 답한다. “둘째가 겁이 좀 있어요. 그 단계를 뛰어넘으면 아마 잘 할 거예요.” 진심이었고, 아이를 키워오면서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중 하나였다. 내 마음 속 외야는 이미 이때부터 내 아이였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미쳤다는 소릴 들을까봐.


5학년부터 시작된 아이의 피구인 생활은 경이로웠다. 방과 후 스포츠클럽 주 1회, 8시 아침 스포츠 주2회, 방학 중 매일 2시간씩 3주 내내 이어지는 피구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가 끝나면 아파트 놀이터에서 해가 지도록 피구 연습을 했다. 때때로 아빠보다 일찍 출근하고 아빠보다 늦게 퇴근하시었다. 집에 돌아오면 그 날의 피구 무용담을 늘어놓으신다. 수다의 마지막은 이렇다. “엄마 관심 없죠?” “미안”이라고 답하고야 만다. 피구보다는 그날의 식사가 더 중요하고, 반복을 싫어하는 엄마라서.


드디어 외야로 뛰는 7월 서울시 교육감배 피구 대회 예선전. 예선전은 서울시 구별로, 방식은 조별 리그로 치러진다. 5팀이 경기를 치른다. 외야에게 주어진 임무는 “원샷 원킬” 한 번 던질 때 한 명 아웃. 아이는 대체로 이 역할을 잘해냈지만 한 타임이 끝나면 파워가 딸려서 다른 외야 선수와 교체되었다. 아직 원탑은 아닌 거다. 조별 리그는 우승으로 끝났다. 피구가 이렇게 파워풀하고 박진감 넘치는 게임이었나? 하기야 <피구왕 통키>의 아빠는 피구하다 죽지 않았나. 피구가 어떤 경기인지 실감나지 않은가! 가을에 치러질 본선 토너먼트가 기대되었다. 경기가 끝나자 “아들 왜 저렇게 잘해요?”라는 응원이 쇄도했다. 아아, 어쩌지? 표정 관리가 안 된다.


뒷정리 하는 체육 선생님께 인사를 한다. “고생 하셨어요~쓰앵님.” 쓰앵님 말씀하신다. “많이 부족해요. 많이. 근데 쎄요. 더 훈련시켜야죠.” 참으로 다정한 찬물이다. 선생님께 사회성 업시켜주는 ‘사회타 500’이라든지, ‘사회민 C’ 같은 거 있으면 한 병 사드리고 싶다. 하지만 체육선생님의 멘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 초등학교에 부임하신지 3년째, 화려하게 등장하셔서 남녀 학생들을 피구의 세계로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방학 중 체육활동으로 지구에서 사라져야 하는 1순위 방학을 회생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저는 방학 내내 학교에 있으니까요.” 이 말씀은 사랑스럽다 못해 거룩하다.


교육감배 결승을 앞두고 친선 경기를 치르는데 동작구청장배 대회가 그것이다. 동작구민 체육회관에서 선수단을 대표해 아이가 선서를 했다. 결과는 5팀중 4등. 눈물을 참았던 아이들이 마지막 경기가 끝나자 울음을 터트린다. 수고한 아이를 격하게 안고 위로하며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만 땀에 쩐 몸이라 흠칫하며 거리를 살짝 두고 아이를 달래본다. 아이는 더 펑펑운다.


엄마는 골똘히 생각한다. 2세트 중 첫번째 세트는 이기는데 두번째 세트에서는 꼭 졌다. 3경기 무승부로 결국 4위. 왜 2세트 중 두번째 세트에서 자꾸 지는 걸까? 아이는 2세트에서 급격히 파워가 떨어지고 내야에서 아웃되어 나오는 몇몇 공격수들과 외야에 나란히 설 때 외피가 딱딱하게 굳어 꼬치에 꿴 탕후루가 되었다. 이 팀은 팀플을 하면서 외야가 홀로 우뚝 서야 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상대팀 내야을 올킬해야 할 외야의 파워와 유연성이 필요한데, 아이가 할 수 있을까? 체육 선생님 말씀하신다. "야 니네 4등이야. 눈치 좀 챙겨~" 이 회복탄력성 좋은 아이들은 그새 신나서 떠들고 있었던 것.


9월 초 교육감배 결승을 앞두고 유니폼이 나왔다. 검은색에 희미한 회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유니폼. 아이는 유니폼을 숭배했다. 저녁에 들어오면 씻으면서 유니폼을 물에 담그고 조금 있다가 주물럭거려서 물을 뺀 다음 옷걸이에 걸어 바람이 가장 잘 통하는 거실 커튼 봉에 걸어두었다. 상하의, 긴 양말까지. 3종이 밤새 펄럭인다. 일주일에 3회 훈련이지만 유니폼은 5일 내내 출근한다. 놀라운 건 이런 아이들이 내 아이만은 아니라는 거다. 이렇게 멋진 새삥 유니폼을 입고 서울시교육감배 결승 토너먼트 첫 경기에서 탈락했다. 오늘 아이는 또다시 탕후루 외야로 빛났다. 예선전의 전력은 증발했다. 안타깝게도 내야 선수들마저 전체가 검은 탕후루가 되어 있었다. 나도 사실 굳었다. 넘 떨려서 눈을 감고 싶을 정도였다. 이게 뭐라고. 정말.


하지만 9월 말 동작구 친선 경기에선 대반전이 일어났다. 4팀 출전 3경기 모두 외야로 뛰어서 이겼다. 그것도 세트 스코어 2:0으로. 심지어 상대 내야 전원 올킬에 외야 혼자 살아남아 경기를 11:0으로 마무리 지은 세트가 2세트나 되었다. 아이들은 외야를 신뢰했고, 내야 주전들과 팀플도 최고였다. 간혹 외야로 내야의 공격수가 나와도 아이는 더이상 탕후루 외야가 아니었다. 아이는 외야청청 빛났다. 


경기가 끝났다. "쓰앵님~ 아이들 도핑 테스트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쓰앵님 말씀하셨다. "하하하. 오늘 정말 잘했어요. 너무 많이 던져서 어깨가 많이 아플거예요. 마사지 잘 해서 풀어주세요" 이다정한 말씀을 아이에게 전하자 아이가 답한다. "엄마 전 지금 멀쩡해요. 내일도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 전 매일 그만큼 던졌거든요." 잊고 있었구나. 연습장 바깥에서 그보다 더 많은 공을 매일 던져왔다는 걸.


이제 올해 마지막 경기가 남았다. 동작관악교육지청 피구 대회다. 아이는 이 경기를 대비해서 검은 손가락 장갑도 마련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검은 장갑이 집에 돌아오면 연필을 잡고 문제를 풀고, 젓가락질을 하고, 기타줄을 현란하게 튕긴다. 검은 장갑이 방에서 자고 있을까 무섭다. 아 과하다 과해. 그런데 유니폼이 아들의 매일 세탁에 격하게 응답했다. 군데 군데 가로 결대로 찢어진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엄마 세탁소에 가면 박아준대요." 웬만하면 내가 꿰매겠지만 이번만은 돈을 쓰기로 한다. 장갑도 곧 찢어질 기세지만 잘 버텨주길.


아이의 피구인 생활은 아마 올해로 끝이 날 것이다. 나도 생전 처음 아이들 경기 따라다니면서 매니저처럼 김밥 찾아가고 물 옮기는 등 선생님을 보조하고 엄마들 의견을 모아 간식 꾸러미를 만들어 보았다.(내가 슬램덩크의 한나다~~) 도통 이런 일에 관심이 없던 나이지만 아이의 열정과 끈기에 탄복하게 되었다. 아이 경기를 쫒아다니고, 마음 졸이고 함께 기뻐하다보니 피구 규칙, 팀의 선후배들, 팀의 스타일, 전략 등을 이해하게 되었고, 아들의 말들을 대부분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 k가 머리를 삭발했어요" 나는 경기장에서 k를 알았다. "동글한 두상과 갸름한 얼굴 덕에 삭발도 어울릴 거야"라고 아이와 웃으며 대화한다. 이제 들리는구나, 너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대화가 즐겁다. 피구 경기가 끝나고 나오면서 한 아이 엄마가 말했다. "피구 잘하면 다 잘하는 걸로." 아이들이 피구를 대하는 자세, 피구 하는 순간의 열정과 매일의 성실함을 보면 이 말을 이해하게 된다.


조선의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은 단종을 향한 자신의 충절과 절개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피구를 향한 아이의 충절과 절개에 탄복한 엄마는 이 구역 피구왕에게 다음 시를 바친다.


이 몸이 던지고 던져 무엇이 될고 하니

초등 피구계의 강철 어깨 되어 있어,

내야 멤버 만건곤할 때 외야청청하리라.














이전 07화 막내 예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