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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Oct 22. 2023

입방정 축구대회

꼴찌를 꼴찌라 할 수 없고.

둘째의 피구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막내는 말한다. "옆에 여자 애들이 형 잘한다고 그러더라고요. 할 말이 많았지만 참았어요" 뭐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묻자, "그 입 닫으라"고 말하고 싶었단다.  막내는 "질투가 나서 죽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뒷좌석에서 운전석을 부여잡고 질투로 타올라 산화하기 직전이었다. 막내는 진심으로 형을 질투하고 있었다.


"너에겐 축구 대회가 있잖아." 형이 피구에 빠져 있다면 막내는 축구에 빠져 있다. 학교 다녀와서 오후 내내 축구를 하고 축구 클럽에 가서 수업 받고 밥 먹으면서는 축구 선수 이름 맞추기 게임을 한다. 저녁 식사 후에는 축구 골의 다양한 사례를 그림으로 그리고, 주말엔 피파앱으로 축구 게임을 한다. 축구 외에 하고 싶은 게 없는데 축구 선수가 못 될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인 막내. 가을이 되면 축구클럽들은 축구대회를 연다. 막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파트 풋살장에서 친구들과 매일 축구를 한다. 축구 클럽은 축구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다니고 있다는 게 아이의 말이다.


6년 전 둘째가 축구 경기를 할 때의 일이다. 경기장에서 아이를 찾아 헤메던 남편. 나는 말했다. "당신 둘째는 공이 없는 곳에서 찾을 수 있어." 둘째는 공이 없는 곳에 주둔했고, 공이 혹시 자기 발 가까이 오면 구운 공을 만난 듯 발로 호호 공을 식힐 뿐 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금메달을 동생 앞에서 두고두고 자랑한 탓에 막내가 축구 대회에 대한 로망을 키우게 된 것이다.


9월 첫번째 클럽대항전이 열렸다. 부모들은 아이들 먹을 걸 잔뜩 싸들고 소풍 오듯 나들이한다. 오리고기쌈밥과 떡볶이 과자 몇 개, 과일 몇 개를 바리바리 싸갔는데 막내 친구 엄마의 간식 가방에서는 화수분처럼 끝도 없이 먹을 게 나와서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식신 둘째를 데리고 가는데 실수했다고 봐야겠지. 그렇다해도 아이들 쫒아다니고 뒷바라지하는 데 있어서는 배테랑들 발톱의 때만큼도 못 따라가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경기가 시작되자 막내 팀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친구가 자책골을 넣었다. 경기가 끝나고 막내는 "친구가 자책골을 넣어가지고"라고 나불대자 친구 엄마가 자기 아이를 감싼다. 막내도 미안했는지 "그래도 잘했어"라고 마무리했다. 다음 경기가 되자 막내가 자책골을 보기 좋게 넣었다. 후반전 골키퍼가 되었을 때는 멍 때리고 있다가 두 골이나 먹었다. 골키퍼가 되니 다른 팀 경기를 보거나 공 멍을 때리기 일쑤더니, 잘 먹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막내는 말한다. "공이 골절되어가지고 자책골이 된 거예요." 굴절이겠지. 골절된 골이 자책골이 되는 것도 틀린 말 같지는 않다. 그 공은 어디선가 휘고 부러졌던 것이다. 그러게 친구 자책골에 입방정만 떨지 않았어도 덜 부끄러울 텐데 말이다.


오늘은 구청장배 축구 대회가 있다. 아침 6시 30분에 구민운동장으로 출발해야 한다. 남편이 식신 둘째와 막내를 운동장에 내려주고 집에 왔다. 자리잡고 앉아서 개회식에 나가기까지 과정을 형제가 스스로 해보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전화가 자꾸 온다. 남편이 먼저 운동장으로 출발, 1시간 뒤에 나도 합류했다. 공공기관에서 주최한 대회의 심각한 문제는 개회사다. 온갖 정치인 무리들이 와서 아무도 듣지 않는 인사말을 늘어놓는다. 개회식만 1시간이라니. 10시가 넘었는데 대회는 시작도 안했다.


첫번째 게임이다. 좀 하나 싶더니 무승부다. 두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이를 아무리 찾아도 없다. 어디 갔지? 경기장 어디에도 없다 싶을 때 골대에서 아이를 발견했다. 골키퍼네. "무슨 재미로 경기를 보지?" 남편이 답한다 "골 먹는 재미지. 드디어 골이 나오겠네" 입이 방정이다. 이 팀은 처음으로 골을 먹었다. 감독님은 소리를 지른다. 저 꼬맹이들 경기에 왜 저리 열을 올리지 싶지만  좋은 감독의 자질은 어떤 경기에든 매순간 진심인 거 아닐지. "빨리 굴려~~" 또 감독님의 큰소리가 들린다.


세번째 경기에서 드디어 골이 터졌다. 막내가 어시스트한 걸로 알고 신났다. 막내는 말했다. "공이 어떻게 들어간 거예요? 넘어졌는데 뒤돌아보니 골키퍼는 없고 공이 들어갔던데요?" 설마 지가 넣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우리들 생각처럼 패스를 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 VR 없으니 어시스트 한 걸로.


저번 대회는 1무 4패, 이번 대회 1승 2무 2패였다. 막내는 저번대회보다 나은 성적이라며 만족한다. 더 낫긴 하지만 둘 다 사실 꼴찌다. 꼴찌를 꼴찌라고 불러주지 않으니 꼴찌라고 할 수가 없다. 이런 대회는 돈을 내기 때문인지 죽었다 깨나도 꼴지를 만날 수 없다. 5팀이면, 1,2,3등 상과 공동 4등 상이 있고, 4팀이면 1등 2등 공동 3등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꼴찌를 없앤다. 꼴찌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팀별은 모르겠지만 개인달리기에는 등수를 따로 매기지 않는 분위기다. 상처받을까봐 말이다. 적어도 이런 팀전이라면 꼴찌가 되어서 함께 꼴찌맛을 나누고 격려하도록 해도 좋을 텐데 말이다.


안노 미쓰마사는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에서 "1등을 해도 자만하지 않고, 꼴찌가 되어도 기죽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뭐든 경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1등이 되기 위해서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서 1등을 해도 뽐내지 않고 꼴찌를 해도 기죽지 않는 그런 프라이드를 갖기 위해서 달리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꼴찌를 꼴찌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세상이라 꼴찌를 해도 기죽지 않는 프라이드도 찾기 힘들게 되었다. 다만, 1등은 뽐내지 않도록 훈련할 수는 있겠지만. 꼴찌를 꼴찌라고 부르고 싶은 1인이라, 이럴 때는 기분이 묘하다.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막내에게 물었다. "꼴찌는 꼴찌라고 해야죠. 눈물 나도록 아무것도 주면 안돼요. 안 그럼 동메달도 참가상이 되고 말잖아요." 연말 연예대상에서 주요 상을 남발하자 이게개근상이냐고 일갈했던 드라마 주인공이 떠오른다. 막내도 알고 있구나. 오늘 참가상 받은 걸. 둘째도 거든다. "꼴찌를 해서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죠." 와우 건강한 형제다. 내친김에 더 묻는다. "네가 꼴찌해도 괜찮다는 거지?" 막내의 답은 늘 대안이 있다. "울면서 집에 와서 엄마아빠에게 위로 받고 보상을 받아야죠. 꼴찌에겐 보상이 있어야 해요." 둘째는 말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겐 금메달이라고 말하자. 그래도 되죠?"


새벽같이 일어나 오전 내내 축구 경기를 관람했더니 가족 모두의 다크서클이 턱 밑으로 내려왔다. 둘째는 집에 오자마자 동네 풋살장으로 뛰어간다. "축구 경기를 보고 왔더니 도저히 안 하고는 견딜 수 없어요. 바로 축구 하러 가야 겠어요." 놀고 싶다는 말을 참 길게도 한다. 식당에서 잠이 든 막내. 집에 오자 마자 형을 따라 아파트 풋살장으로 뛰어간다.오늘 먹은 축구골만큼 뱉어내려나? 동네 축구에선 형들이 버티고 있을 테지만 한 골이라도 넣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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