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020년 초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 갑자기 입원한 엄마는 흡인성 폐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 두 달간 이어진 치료가 가까스로 끝나 퇴원할 때 의사는 집으로 모시기는 힘들 거라고 했다. 결국,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됐다. 그때 요양병원에 엄마를 입원시키면서 코로나가 장기간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코로나로 확진자가 크게 늘어날 때였지만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면회에 제약이 따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코로나 이전에 병원 면회는 늦은 저녁 시간이 아니라면 아무 때나 가능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를 보러 간다. 이렇게라도 보게 된 건 올 초부터다. 치매가 심한 상태에다 두 번이나 뇌경색이 왔던 엄마는 이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엄마를 보러 가면 침대에 누워 간신히 눈을 뜨고 계신 엄마를 보는 게 전부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손을 잡아도 엄마는 응답하지 않는다. 그걸 보는 마음은 참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게 참담하다. 2년 전, 가래 배출이 쉽지 않아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걸 막아야 한다며 기관절개술을 해야 한다고 요양병원 담당 의사가 말했을 때 엄마의 고통이 이렇게 깊을 줄 몰랐다. 누워만 있으니 서서히 온몸은 마비돼 가고 자주 고통스러운 석션을 해야만 하는 상태로 엄마는 얼마를 더 견뎌야 할까?
그런 괴로움 속에서 바늘구멍만 한 빛을 보는 심정으로 떠올린 기억에는 방 한가운데 놓인 밥상과 엄마의 자그마한 부엌이 있다. 그곳에서 일곱 식구의 삼시 세끼와 오 남매의 도시락과 손님상이 차려졌다. 매일 밥상에 올라온 음식은 셀 수 없이 많지만, 학교 다닐 때 도시락으로 싸준 볶음밥이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그건 수요일마다 볶음밥을 싸 주셨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된 볶음밥은 친구들한테도 유명했다. 친구들은 엄마의 볶음밥을 먹고 싶어 했고 아예 도시락을 바꿔 먹자는 친구까지 있었다. 가끔 집에서 손님상을 준비하실 때면 양장피 잡채나 구절판 같이 보기에도 화려한 음식도 잘하셨다. 우리 간식도 자주 해 주셨는데 어느 날, 딸기 롤케이크를 해 주셔서 제과점도 흔치 않던 때에 놀랐던 적이 있었다. 롤케이크를 썰 때 엄마의 손길은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밥상에 올라온 음식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시간은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풀어 줬다.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아직도 모르겠다. 일주일에 한 번 엄마가 누워계신 침대에 형제들과 둘러앉아 엄마를 보고 손을 만지고 소리 내 ‘엄마’라고 부르는 시간에 엄마의 고통을 가져오고 싶어 마음은 애가 탄다. 더 무엇을 해야 할지, 아니면 할 수 있을지 모를 시간을 앞으로도 기약 없이 보내야 할 텐데 이 짧은 글을 우려내 슬픔을 덮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 길을 함께하는 두 언니와 오빠, 그리고 남동생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결혼 후 각자의 가족을 돌보며 바쁘게 살던 형제들이 이렇게 자주 만난 적이 있었던가.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누워계신 상태에서도 우리를 모이게 하고 있으니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