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영편지(2부)17

 04월 04일

by 순례자

  사랑하는 아들아


  4월 4일 아침 8시 55분이다. 아침에 신우회 선생님들이 방송실에서 잠시 모여 기도회를 갖는다. 나라와 학교와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위해 기도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통성으로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내가 왜 교사로 이 자리에 섰는지, 학생들에게 어떤 교사가 돼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고 방송실문을 나선다. 기도를 마치고 창밖을 봤더니 어제의 햇살이 아니구나. 아침 햇살이 밤사이의 찬기운을 서서히 밀어내며  환한빛으로 싱그럽게 일제히 펼쳐졌다. 이제 추위는 물러가고 따뜻한 봄이 오려나보다. 이 시기가 지나면 영하의 추위는 없지 않을까 싶다.


교무실의 아빠 자리로 돌아와 부대에서 온 너와 전우들의 훈련소 기념사진을 보고 있다. 한가운데 딱 버티고 앉아 왼손을 번쩍 들어 올린 아들의 모습을 본다. 오른손은 쫙 펴서 명치 위에 올려놓은 작은 단체 사진인데  얼굴이 약간 긴장돼서 굳어 있다. 너뿐 아니라 함께 찍은 9명의 전우들도 모두 표정이 굳어있다. 아마도 부모님께 보내려고 부대에서 연출해서 찍은 사진이어서 인지 좀 어색하기도 하다. 그래도 건강하고 씩씩한 신병들의 모습이 풋풋하다. 수학여행 사진도 아닌데 환한 얼굴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지? 전우들과 함께 건강한 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구나.


 어제 4월3일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니? 네가 어학병으로 입대하지 않았으면 어제가 정식 입대날이다. 지난 4주간의 일정을 되돌려 훈련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머리털이 쭈뼛설 것 같다. 옛말에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먼저 해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이제 네 훈련 일정도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4주 전으로 다시 돌아가 훈련을 받는다는 생각만 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일이다. 이곳에 있는 엄마 아빠도 상상하기 싫은 일이다. 


  네가 입대한 날부터 지난 4주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겨운 훈련이라도 시간은 어쨌든 흘러서 훈련소 수료식이 다되어 가는구나. 첫째도 안전과 건강, 둘째도, 셋째도 안전과 건강이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주어진 시간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잠잠히 묵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세형이의 일생은 하나님이 쓰실 것이니 시간과 능력도 그분께서 알아서 인도해 주실 거다. 아니면 하나님이 손해지.


  헬라 사람들은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누어서 구분한다. 그래서 성경에도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적용해서 말한다. 크로노스는 가만히 있어도 그냥 흘러가는 자연적인 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을 말한다. 해가 뜨고 지면서 결정되는 시간이고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결정되는 시간이다. 우리의 육체를 늙게 하고, 죽게 하는 그런 시간이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 들어 있는 사람에게 발견되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말한다. 카이로스는 영원한 시간,실존적 시간,하나님의 목적과 때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보편적인 인간들이 육신으로 감지하는 시간은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 그 의미 있는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뤄져서 말씀이 내 자아를 무릎 꿇게 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겠다는 결단과 행동이 이뤄지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된다면 그걸 카이로스라고 한다. 그러니까 성도라면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면서 그 시간에 이끌려 아무 의미 없이 종속되고 끌려 다니며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서 자신에게 주어진 크로노스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들을 재해석하여 살게 되면 그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는 거다.


  성경에서 ‘때가 찼다, 때가 차매, 때가 이르매’ 이때 등장하는 그때가 바로 카이로스다. 이 역사를 살지만 그 역사 속에서 묵시와 연결되어, ‘아 하나님 바로 이것이군요!"라고 깨달으면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이다.


죽도록 고생했던 그 시간들이 나를 이렇게 하나님께로 이끄는 시간들이 되었다고 재해석을 하면 그  크로노스의 시간이 가치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나에게 재해석되는 것이다. 크로노스가 카이로스로 이해되면 그 어떤 순간도 가치 없는 순간이 되지 않겠니? 모든 순간 모든 시간들이 다 하나님의 장중에서 벗어난 시간이 없으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순간이며 시간이다. 내게 카이로스로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기적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가치 있는 시간들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아들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발견해 내는 오늘이 되었기를 기도한다.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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