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크는 아버지 3화

by 순례자

2000년대가 막 시작된 겨울 2월 초순에 일이었다. 우리 가족은 중국의 대도시 중에 하나인 T시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무채색의 거대한 도시는 황량했다. 바둑판처럼 쭉쭉 뻗은 16차선 도로 옆으로 회색빛 건물들이 사열식을 하듯 가지런히 서있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산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산자락이 도시 전체를 병풍처럼 둘러싼 새둥지같이 아늑한 서울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600만 명이었다. T시는 인구가 약 1,000만 명이고 면적은 서울의 두 배 정도이다. T시는 1980년대 지방 대도시 같았다. 숲 하나 없는 이 거대한 도시는 도시 전체를 샛강처럼 둘러싼 인위적인 거대한 수로가 도시의 먼지와 습도를 조절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방의 땅, 낯선 나라 중국, 하지만 공산주의의 땅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의 삶은 자유로워 보였다.


아이는 한국정부에서 세운 한국국제학교의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우리는 등교와 출근을 함께했다.한 캠퍼스 안에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두 있는 소규모 학교였다. 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아파트에 정착한 우리의 중국 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아내와 나는 T시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우리는 제일 먼저 자전거를 샀다. 아이가 자고 있는 새벽에 일어나 아파트 앞 16차선의 도로,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그 황량한 새벽 도로를 마음껏 헤집고 다녔다. 가락 시장을 절반쯤 축소해 놓은 새벽 시장으로 달려가서, 과일을 종류별로 가득 실어 날랐다. 그리고 20분쯤 떨어진 소문난 빵집에서 아침에 갓 구운 빵을 종이 봉지에 사들고 오는 것이 매일 아침의 유괘한 일과였다. 나는 "야호!"를 외치며 신나게 자전거를 탔다. 그야말로 해방의 시간이었다.


첫 학기에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았다. 남녀 합반이었고 20여 명의 학생 중에 여학생이 훨씬 많았다. 해외 학교 특성상 중고등학교 4개 학년을 가르쳐야 했다. 수업 준비로 늘 분주했지만 즐거웠다. 수업 중에 딴짓을 하거나 자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고 수업 분위기는 늘 활기찼다.


아이들은 첫 만남부터 활달하고 친근하게 나를 환영해 줬다. 호기심도 열정도 많았다. 왜 중국에 나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결혼은 했는지, 와이프는 예쁜지, 아이는 있는지 끝없이 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반 여자 아이들이 복도에 지나가는 내게 다가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는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나를 무척 당황스럽게 했다. 남자 고등학교에서만 근무했고 딸이 없는 내게 어느 날 십여 명의 딸이 생긴 것이다. 언어라는 것이 묘해서 이들이 나를 '아빠'라고 자연스럽게 부르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저절로 기울여졌다.


학급 구성원의 성장 배경도 다양했다. 중국 현지에서 태어난 아이, 부모님이 현지에서 사업 혹은 자영업을 시작하면서 중국으로 전학 온 아이, 기업의 주재원 자녀, 외교관 혹은 다른 직종의 공무원 자녀 그리고 교사 자녀들이다. 아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첫 번째 차이는 거주 기간에 따른 중국어 실력이다. 비교적 오래 산 아이들은 원어민에 가까운 중국어 실력을 가졌다. 갓 이주해 온 아이들이 가장 힘겨워하는 것은 중국어였다.


이 아이들에게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도움에 망설이지 않았다. 여자 아이들의 영향력이 훨씬 컸는데, 한국에서 막 전학 온 아이들이 있으면 따로 시간을 내서 중국어 공부를 돕는다. 주말이면 함께 시내로 나가서 먹고 놀고 쇼핑을 하면서 중국어가 필요한 일상의 대부분의 일에 동참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중국어를 빠르게 배웠다. 아마도 오랜 해외 생활동안 자신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성숙한 행동일 것이다.


반면 우리 아들의 학교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한국에서 '니 하오' 정도만 배워 온 아이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그 또래의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짓궂다. 중국어를 못하는 아들을 늘 심하게 놀렸다. 어느 날 음악 시간에 새로 전학 왔으니 장기 자랑을 해 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솜씨를 발휘한 날부터 남자아이들의 미움은 더 심해졌다. 여자 아이들이 피아노를 치는 아들의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남자아이들은 방과 후에 교문에서 기다렸다 아이의 바이올린을 낚아채 가거나 신발을 숨겨 놓는 일이 잦았다.


아들은 중국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뿐 그런 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전학 온 지 2개월쯤 지난 후에 아이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우리 아이가 같은 반 아이들 두 어 명의 코피를 터트렸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제가 싸움이 난 전후 사정은 잘 알고 있지만, 코피 터진 아이의 엄마들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그래서 나는


“선생님 연락처를 주시면 제가 아이를 데리고 가서 부모님과 아이에게 사죄드릴게요.”


라고 했으나 선생님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아이만 잘 타이르라는 것이었다. 아이를 붙잡고 다구 쳤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폭력은 안된다고 했지!"

"이 자식들이 또 내 바이올린과 신발을 숨겼지 뭐야, 그래서 찾아 놓으라고 하니까 신발을 한 짝씩 운동장으로 던져 버리고, 내 바이올린을 발로 차잖아."


아이는 한국에서 갈고닦은 체력으로 문제의 돌파구를 ‘힘’으로 해결했다. 그 후로 아이들의 괴롭힘은 없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코피 터진 아이는 담임 선생님과 체육 선생님의 아이였고, 그 일 후에 아이는 미운털이 박혔는지 납득하지 못할 일로 자주 꾸중을 들었고 의기소침해졌다.


다행히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면서 갈등은 서서히 해소되었다. 아예 축구화를 신고 등교했다. 방과 후에는 책가방을 던져 놓고 해 가질 때까지 축구를 하고 함께 길거리 불량식품을 깔깔거리며 나눠먹으면서 아이들과 차츰 친구가 되어 갔다.


내 생활은 즐겁고 행복했다. 많은 시간 수업을 준비해야 했지만 수업 시간의 즐거운 분위기는 내게 가르치는 기쁨을 주었다. 특히 학생 수가 적어서 작문과 토론 수업을 하기에 좋았고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수업은 활기찼다.

한국국제학교 특성상 교육과정 필수 이수과목을 설정하고 나머지 교과는 영어와 중국어에 비중을 두었다. 한국과 비교하면 교사 수급이 부족해 특히 과학 교과의 심도 있는 수업이 어려웠다. 한 교사가 여러 학년을 걸쳐 가르쳐야 해서 교과별 심화학습도 이뤄지기 힘들었다. 영어와 중국어는 비교적 세분화됐고 원어민이 가르치니 한국보다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이다. 학교 문밖만 나가면 중국어가 아니면 의사소통이 안되니 아이들의 중국어 학습 속도는 빠르게 늘었다. 영어는 사용할 기회가 별로 많지 않아서 한국과 비슷했다.


* 이 글은 2000년대 초반 제가 근무했던 때의 일을 적은 것 입니다. 지금의 학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먼 옛날의 일임을 밝힙니다.


*사진 월드코리안뉴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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