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크는 아버지 2화

by 순례자

아내와 나는, '아이가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누리고 살도록 하자'는 기본적인 교육관에 합의했다. 물론, 초보 아빠로서 유아교육 전문가들의 책을 두루두로 읽고 난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많이 보여주고, 신나게 뛰어놀고, 두 가지 정도의 악기를 가르치자"


는 실천 계획을 세웠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아내가 백번 양보했다. 역마살이 있는 나는 신이 났다. 문자로 세상을 배우기 이전에 아이가 세상에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만지게 해 주자는 계획을 실행했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유아 안전시트에도 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아기 욕조에 이불을 깔고 안전띠와 보조띠를 이용해서 욕조를 조수석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틈만 나면 전국의 산과 바다, 강을 돌아다니며 야영을 했다.


여름에는 흙을 맨발로 밟고 진흙을 만지고 뒹굴고 놀게 했다. 튜브를 온몸에 두르고 흐르는 강물에 둥둥 떠서 흘러가게 놓아주었다. 여름에는 곤충 채집을 하고, 큰 유리 수조를 사서 곤충 나라를 만들었다. 직접 채집한 개미로 개미집을 만들고, 썩은 나무에서 찾은 사슴벌레와 하늘소 등의 애벌레(유충)를 유리 수조에서 함께 키웠다. 사슴벌레 유충이 알에서 깨어나 나무속에서 자라고, 썩은 나무를 먹으며 2~3번에 걸쳐 탈피하다가 번데기가 되고 2~3주가 지나면 성충이 되는 과정을 먹이를 주며 함께 관찰했다.


축구, 스케이트 교실, 수영 교실은 집 근처의 사회체육센터를 제법 오랜 시간 보냈다. 엄마 아빠가 전혀 재주가 없는 음악교육에 대해서 아내와 의논했다. 서양화 전공을 하고 화실을 했던 아내는 아이가 물감을 가지고 놀게 했지 그림은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아내는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야겠다고 고집했다.


뿌리 깊은 사연이 있었다. 아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고향에서 본 한 오빠에 대한 동경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초등학교 남자아이들은 겨울에 누런 코를 손으로 쓱 닦은 거무죽죽한 얼굴을 하고 구슬치기며 자치기, 말뚝박기, 공차기 등을 하고 놀았다. 대부분 태권도장 운동복을 아무렇게나 입고 짓궂게 놀았다. 그런 시대에 아내보다 3살 정도 많은 약국집 도련님은 캔디의 테리우스를 떠오르게 할 만했다 한다. 열심히 공을 차는 꼬질한 아이들 옆으로 테리우스처럼 치렁한 머리를 흩날리며 단정한 정장에 나비넥타이까지 하고 바이올린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 그 동네 모든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내는 그때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저런 남편을 만나든지 아니면 아들을 저렇게 키우겠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바이올린은커녕 악기에 전혀 재능이 없고, 금발을 휘날리는 테리우스는 고사하고 긴 사자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산으로 들로 야영을 다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아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동네의 꼬질한, 공차는 아이들 중에 하나였던 나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아내의 소망을 들은 나는 아들을 테리우스처럼 키우겠다는 2차 계획에 동의했다. 이 정도 소원쯤 들어줄 수 있었다.


아내는 아이가 5살이 되면서 피아노 학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좋은 선생님을 찾아서 집에서 20분을 걸어야 하는 학원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고 아들의 손을 잡고 다녔다. 아이가 피아노에 익숙해질 무렵 7살이 될 때 드디어 아내는 바이올린을 샀다. 그리고 아내가 꿈꾸던 테리우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들이 학원에 가기 싫어하는 날은


"그래, 하기 싫을 때도 있지, 그러니 오늘은 엄마가 네가 원하는 과자를 모두 사 줄 테니 한 보따리 사서 학원에 가서 아이들과 먹고 놀다 와."


하며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 놓았다. 엄마의 고단수 작전에 속은 아이는 한 번도 학원을 빠지지 않고 다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을 마치고 초등학교에 들어갈 쯤에 우리의 교육관에 대해 아내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한 마디씩 했다.


“ 첫 아이라 모르는 모양인데, 아이를 그렇게 놀리면 안 돼. 좋은 대학 보내려면 지금부터 공부 습관을 익혀 놔야지 나중에는 못 따라가!, 맨날 아빠가 야영 데리고 다니고 운동 배우고 악기만 배우면 어떻게. 지금부터 수학, 영어 공부를 시켜야지 놀리기만 하면 나중에 못 따라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SKY에 갈 수 있을지 결정된다고. ”


그 당시도 다들 ‘선행 학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을 앞에 놓고 SKY에는 가야 한다고 주문하는 세상에서, 우리 부부는, 우리의 선택이 옳은지 가끔씩 반문을 했다.


“다들 우리 걱정하는데, 우리가 잘 못하고 있는 것 아냐?”


하지만, 치열한 입시의 대열에 일찌감치 아이를 던져 놓기는 싫었다. 그 당시 나는 연속 3년째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이었다. 바로 학교 앞에 살았지만 아침 7시에 0교시에 보충수업을 시작해서 하루에 4시간 수업을 마친 후에 2시간 보충 수업을 더 했다. 하루 종일 교과서와 여러 종류의 문제집을 읽고 풀기를 늘 반복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3 자율학습으로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야 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서울에서 입시 결과가 상위권에 있는 학교였다. 외고가 1992년, 과학고가 1983년, 자사고가 2002년에 처음 만들어졌으니 그 당시에는 현재와는 다른 고등학교 구성이었다. 일반고가 대부분이었던 입시에서 학교 간의 경쟁은 오히려 치열했다. 그즈음에 나는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있었다.


대학 입시 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돼서 교사와 학생들 모두 정신적으로 지쳐만 갔다. 학생들은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호소했다. 대학 서열화가 공고해진 사회에서 기득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상위권 대학 진학이 유일한 목표였다. 공정한 경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사교육비 부담 능력에 따라 계층 간의 불평등이 점차 심화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번아웃이 된 나는 이런 교육의 현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이에게도 보다 자유로운 교육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2000년대 초반 1월 1일이었다. TV의 신년 특집 방송이 온통 중국 일색이었다. 중국이 10년 안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된다는 메시지가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들여왔다. 약속이나 한 듯이 중국 이야기뿐이었다.


그 시기쯤 학교에 중국 원어민 선생님이 보조 교사로 근무했다. 보충수업이 없는 날 원어민 선생님에게 중국어를 아이와 함께 배우고 있었던 터라 흥미 있게 방송을 보았고 운명처럼 ‘중국’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날 잠자리에 누웠다. 10여 년 뒤에는 중국에 세계 2대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는 아침에 본 방송이 자꾸 떠올랐다. 중국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밤 새 뒤척거리며 중국을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중국에 한인 관련 직장을 며칠 동안 수소문해서 찾아냈다. 교육부에서 해외교민 자녀 교육을 위해 세운 한국국제학교가 전 세계에 12개가 있었다. 학기가 모두 끝나는 시기였다. 서류를 꼼꼼히 준비해서 몇 개 학교에 원서를 냈고 한국에서 면접을 보고 최종 합격했다. 한국의 직장에는 휴직계를 냈다. 이 일이 최종 결정되는 데는 석 달도 걸리지 않았다. 아내는 걱정 어린 표정이었지만


"우리는 어디든지 함께 간다!"


는 결혼 전 우리의 약속대로 마지못해 승낙했다. 물론 이 일이 이뤄지는 일은 쉽지 않았다. 2000년대가 막 넘어간 시기였다. 난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사립고등학교에서는 다른 나라 학교 근무를 위한 휴직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하늘이 도우셨다. 교육부에 계속 알아보다가 극적인 순간에 사립고등학교 교사들에게도 대체 교사가 지원되는 법안이 지난달 처리됐다는 소식을 장학관으로부터 받았다. 대체 교사로 해외에 나가 근무할 수 있는 첫 번째 교사의 수혜를 받게 된 것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살고 있는 집의 전세를 놓아야 하는데 출국일인 2월 14일을 열흘도 남지 않았는데 집 보러 오는 사람이 뚝 끊어져 버렸다. 고민 끝에 나는 집을 아예 매매로 내놓았고 출국 이틀 전에 집이 팔렸다.


참으로 단순하고 무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결단이 아니었다면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려 깊은 행동을 하지 못할 만큼 입시 현장에서 나는 지쳐 있었고 탈출하고 싶었다.


출궁을 위해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내가 살아온 날만큼 너무 많은 일들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다. 그 일들은 처리해야 할 이삿짐을 보는 것 같아 한숨이 나왔다.


짐을 열심히 정리하고 있는데 곁에서 아이가 묻는다.


“아빠, 우리 어디가?”, “응 중국!”, "왜? 갑자기?", ".........", "나는 좋아, 어디든지 아빠와 함께 간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 이 글은 2000년대 초반 제가 근무했던 때의 일을 적은 것 입니다. 지금의 학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먼 옛날의 일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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