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교육에 관한 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일가견이 있다. 가만히 듣고 있자면 자녀를 키우는 모든 사람들이 전문가다. 그런데 막상 내 자녀가 유치원에 들어갈 즈음이 되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한다. 대부분 한 가지 생각에 맞춰있다.
'우리 아이를 어떻게 공부시켜서 공부 잘하는 아이를 만들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평생 학교를 떠나지 않고 살아서 자녀 교육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 모든 질문을 한 가지로 요약하면
"선생님,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가 공부 잘할 수 있나요?"
사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적어도 내가 전공하고 가르친 과목에 대해서 묻는 다면이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양심에 손을 얹고 공부 잘하는 법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스스로도 공부를 썩 잘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자녀 교육에 대해서 이렇다 할 말도 없다. 내가 확실한 노하우가 있다면 그 방법을 내 아이에게 적용해서 최고의 결과를 얻어 낸 후에 '자녀 교육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책이라도 낼 수 있겠지만 그렇지도 못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로 똑똑한, 번쩍번쩍한 천재성을 발휘하는 아이들이 많은 세상에서 '자녀는 이렇게 키우세요.'라고 말할 주제가 못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이 온통 '공부 잘하는 아이'로만 집약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사랑이 많은 아이, 배려심이 많고 따뜻한 아이,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 자신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거의 만나 본 적이 없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내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그러면 좋지요. 그런데 공부를 잘해야지요."라고 하며 한숨을 쉰다.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 첫선을 보이던 날을 생각해 보자. 아이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고 희망이다. 나는 모든 부모들이 자녀의 공부에 대해 고민을 할 때면,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 탄생해서 그 첫 얼굴을 대면할 때의 기쁨을 돌이켜 보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생뚱맞게도 면담을 하러 오신 부모님들에게
"지금도 자녀에게 오롯한 사랑을 베풀고 있으신가요?"
라고 묻는다. 나의 이런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물론이지요!'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이 상황에 웬 뚱딴지같은 질문이야?"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젊은 부모들이나 전문가들이 TV에 나와서 자녀 사랑의 성공 방정식을 수능 문제 풀이하듯 명쾌하게 설명해 내지만 그들이 자기 자녀에 대해서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자녀 교육은 현재 진행형이다. 나무도 오래도록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영양제를 주며 사랑으로 키우는데, 하물며 우리 자녀는 어떻겠는가? 학교 현장에서 오랜 시간 머문 나는 많은 아이들의 성장과정과 결과를 보았다. 결론은 교육은 현재 진행형이란 것이다.
잘 자란 자녀의 특징은 부모가 자녀를 믿고 오랫동안 신뢰와 격려를 보여준 아이들이었다. 내 자녀가 지금은 내 맘에 덜 들어도 믿고, 배려하고 참고 사랑으로 양육하면 모두 제 몫을 다하는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한다.
나 역시 자녀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사랑과 배려와 오래 참음”이 가장 효과 있는 자녀 교육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 땅의 평범한 아버지요, 가장으로서 그런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자녀 교육에 대해서 내 자녀 얘기를 쓰는 일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내 세울 것도 별로 없는 자녀 양육의 좌충우돌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써보고 싶었다.
나는 이제 자녀 양육에 한숨을 돌렸다. 그래서 이제 30대가 된 아이의 성장 과정을 늘 곁에서 함께 지켜본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다. 이제는 아들이 정신적, 물리적, 물질적으로 완전히 독립해 있다는 것도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다.
이 글은 아내와 함께 아들과의 좌충우돌의 이야기이다. 그냥 자녀 육아 일기라고 하면 좋겠다.
몇 화를 써야 할지는 독자의 반응에 따라 결정하려 한다.
제1화: 유아기-내 이름은 껌딱지
결혼 후 3년 만에 아들을 갖은 우리는 신생아 대기실에서의 아이와의 첫 만남을 잊을 수 없었다. 30여 명이 누워있는 대학병원 신생아실에서 또래보다 큰 덩치에 눈을 크게 뜨느라 이마에 주름까지 잡힌 우리 아이를 간호사님이 보여 줄 때 사람들은
“어머, 쟤는 벌써 돌 된 아이 같아요.”
라는 말로 우리 부부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온 가족이 집에 돌아와 삼칠일을 보내고 장모님이 고향 댁으로 돌아가신 후에야 초보 부모는 아이의 웃음 뒤에 험난한 가시밭 길이 놓여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되었다. 낮잠도 없이 하루 종일 잘 먹고 잘 노는 아이의 체력에 아내는 녹초가 됐고, 밤이 되면 아이는 부모의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퇴근을 하자마자 밥 먹고 그대로 자서 밤 10시에 일어나 아이를 보기 시작했다. 아이가 “코로르~” 잠든 듯해서 살며시 내려놓으면 이내 눈을 떴다. 아이를 밤 새 안고 서성이다가 등 뒤에 이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선잠을 자다 거실에서 늘 새벽을 맞았다. 수탉 보다 아침을 먼저 맞았다. 내가 꼬끼오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1년 가까이를 보냈다.
‘독박육아’라고 했나. 우리 부부는 단 1시간이라도 아이를 봐주는 사람을 천사라고 생각할 만큼 육아의 피로에 지쳐있었고. 부모 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워가고 있었다. 물론, 아침이 되면, 눈부시게 방글방글 웃어주는 아이를 볼 때면 지난밤의 피로를 말끔히 잊어버릴 만큼 행복했다.
아이의 분리 불안증에 가까운 잠버릇과 함께 이 녀석의 고집스러움을 가슴팍에 새긴 첫 번째 사건이 생겼다.
아이는 안으면 꼭 앞을 봐야 하고 유모차를 절대 타지 않는다. 또래 보다 훌쩍 큰 아이를 작은 체구의 아내가 안고 버티느라 저녁이면 끙끙거리며 허리도 펴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와 작전을 짰다. 업는 습관을 들이기로 했다. 우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킨 후 아이를 등에 업었다. 징징대는 소리를 뒷전으로 하고 자장가를 부르며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잠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는 조금 전 먹은 온기가 그대로 남은 우유를 내 목덜미와 등 뒤에 모두 토해 놓았다. 시큼하고 끈적한 흔적들을 닦아내면서, 우리 부부는 앞으로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 본성이 못됐다는 것을 나날이 경험했다. 나는 참을성도 부족하고 너그럽지도 못한 아버지였다. 나의 아비답지 못한 “참을 없는 존재의 경박함”을 깨닫는 두 번째 사건이 터졌다.
아내의 귀가가 늦은 어느 날, 아이는 이유식도 먹지 않고 칭얼댔고, '단 한 시간만이라도 자고 싶다'는 생각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곤에 지쳐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이유식 대신 장난감 볼링 핀을 입에 넣고 징징댔다. 나는 아이의 손에서 사납게 볼링핀을 낚아채고 이유식을 들이밀었다. 아이는 음식을 고스란히 다 토해내며 볼링핀을 두 손으로 붙잡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나는 볼링핀으로 아이의 머리를 ‘딱’ 소리 나게 후려쳤다.
‘후려쳤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일순간 방안의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동시에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는 눈도 깜짝 않고 맑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나는 혹시나 아이가 숨을 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고 싶을 만큼 아이는 꼼짝도 않았다. 머릿속이 하에 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아빠가 정말 미안해, 미안해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어쩔 줄 모르고 아이에게 사과했다. 그리곤 아이를 안고 집안을 서성이며 가능한 오랫동안 아이와 눈을 피해야만 했다.
세 번째 사건은 10개월과 11개월 두 달 사이에 연이어 일어났다. 아이는 용변을 일찍 가렸다. 10개월이 되면서 용변이 마려우면 기저귀에다 볼 일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기저귀에 용변을 보고 나면 당장 기저귀를 갈아야만 했다. 용변이 마려우면 신호를 보냈다. 그래서 10개월 만에 기저귀를 떼었다.
11개월째 되던 날, 처가 어른들과 동서들이 포항 횟집에 모였다. 출렁이는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 한적한 횟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큰 동서의 3살 다섯 살 배기 아이들이 탁자 주변을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아이는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사촌들의 흔적을 좇았다. 한참 후에 아이가 탁자를 잡고 몇 걸음을 떼고 넘어 지기를 반복하다가 균형 잡히지 않은 걸음으로 아이들을 쫓아 위태롭게 뛰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배우기 전에 뛰기를 먼저 배운 것이다. 11개월에 걷기도 전에 뛰었다.
식사를 마치고 처가로 돌아와 후식을 먹으면서 아이들과 외할머니의 윷놀이가 시작됐다. 윷가락을 던지고 말을 옮기며 엎치락뒤치락하며 말을 잡고 잡히는 윷놀이의 열기가 무르익을 때였다.
아이는 윷가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윷가락을 집어 들거나 윷판의 말을 손에 쥐었다. 윷놀이에 방해를 받던 사촌들에게 몇 차례 저지를 당하고 밀쳐지고, 움켜쥔 손에서 맥없이 윷가락이나 말을 빼앗기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됐다. 그러자 아이는
“이게 무슨 짓이야, 같이 해야지!”
하며 윷판을 확 뒤 집어 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