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T시에 첫발을 내딛은 지 2달이 지났다. 우리 가족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스케치북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 기존에 지닌 배경 지식과 경험이 작동한다. 내가 보고 듣고 배운 지식이 일제히 움직이면서 새롭게 마주 대한 과제들을 해결해 나간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내 경험이 무용지물이었다.
중국 땅에서 나는 가장으로서 무기력했다. 아파트 화장실에 문제가 생기거나 전기와 수도가 말썽을 일으켜 한겨울에 추위에 오들오들 떨게 돼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용기를 내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도 지금 내가 겪는 상황을 설명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번역기나 통역기가 전혀 없던 시대였다.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일일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나는 매일매일을 내 앞에 놓인 중국 생활이라는 스케치북에 더듬거리며 그림을 그려 나갔다.
일단은 중국어를 배워야 했다. 언어란 것이 절실하면 더 빨리 배워지는 것이다. 지금보다 절박한 상황이 어디 있을까?
중국어 선생님을 수소문했다. T시 사범대학 중국어학과 3학년 여학생을 소개받았다. 한족인 그녀를 우리는 '장 라오스'라고 불렀다. 단정한 차림에 편안한 미소를 지닌 맵시 있고 아담한 중국 여성이었다. 장 라오스는 월, 수, 금, 토요일에 우리 집에 왔다.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오후 4시경에 집에 온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나서 간식을 먹으며 아들과 공부하러 방에 들어간다. 장 라오스와 같이 보내는 시간은 모두 과외비로 지불했다. 3시간씩 우리 집에서 머물다 갔다.
중국어로 과외를 '푸다오'라고 한다. 일상을 같이 하면서 언어와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미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장 라오스와 긴 시간을 보냈다. 한자를 배워보지 않았던 아들이 중국어를 공부로 접근하면 거부감이 들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상냥하고 예쁜 여선생님을 구했다. 주말에는 장 라오스가 일찍 집에 왔다. 함께 아침을 먹고 매주 토요일마다 장 라오스의 안내로 T시의 구석구석을 함께 다녔다.
T시의 문화가 시작된 고문화 거리로부터 시작해서 매주 주말여행을 했다. 차탕도 먹고 전통 배떡도 사고 만담도 듣고 민속박물관에 함께 다녔다. 주변의 사찰도 다니고 호수 공원에서 배를 타기도 했다.
장 라오스의 빈틈없는 계획으로 매주마다 T시의 문화와 예술, 쇼핑과 먹거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토요일에는 6시간 정도의 과외비를 지불했다. 당시 중국의 임금이 낮고 환율도 좋았다. 과외비가 시간당 10위안(당시 한국돈 1100~1200원) 정도여서 가능했다.장 라오스도 우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다른 알바를 찾지 않아도 됐고 어떤 알바보다 수입이 좋았다고 했다.
당시 T 한국국제학교 초등부의 중국어는 학년 구분 없이 A~D 반으로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A반이 가장 낮고 D반이 높았다. 중국에 첫 이주해 온 학생들이 A반이었고 아들도 A반에 있었다. 학기마다 2번 레벨테스트를 통해 반을 재편성했다. D반에는 중국에서 태어났거나 원어민 수준의 아이들이 있었다. 아들은 1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C반이 됐다. 우리 일상생활의 의사소통은 자연스럽게 아들이 해결했다.
아내는 아들 공부가 끝나면 일주일에 2번씩 장 라오스에게 중국어를 배웠다. 나는 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장 라오스가 소개해준 친구 린 라오스가 학교로 찾아왔다.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수업이 없는 시간에 중국어를 배웠다. 내 중국어 과외비는 학교에서 지원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중국어를 배워나갔다.
언어가 해결되면서 주변의 불편한 일들이 봄 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우리 앞에 놓인 스케치북에 중국의 삶을 그려낼 수 있었다. 밑그림과 색채를 보기 좋게 그려 나가기 시작하면서 중국 생활도 편안하게 정착해 나갔다. 아들이 월트디즈니 만화 영화 마니아였고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 학원을 다녀서 학교의 원어민 영어 수업은 어려워하지 않았다.
아이는 한국에서 배웠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계속 배우고 싶어 했다. 피아노는 한국인 선생님에게 배웠다. 현지 주재원으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온 음악을 전공한 분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배웠다. 바이올린은 T시 시립 오케스트라 교향악단 바이올리니스트를 소개받았다. 아내의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은 중국에서도 계속됐다. 화요일과 목요일에 T시 예술극장으로 바이올린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아들은 이 일련의 프로그램들을 즐거워했다. 하기 싫다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고 레슨 시간이 되면 바이올린을 X자로 메고 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려 섰다.
만만치 않은 중국 생활에 서서히 정착할 무렵이었다. 우리 삶의 터전을 옮길 만한 예상하지 못한 첫 번째 복병을 만났다. 황량한 중국의 겨울이 지나고 버드나무 가지에 새싹이 파랗게 올라오는 기쁨도 잠시였다. 16차선의 대로를 휘감고 몰아치는 모래 바람에 눈을 뜰 수 없었다. 황사였다. 5월과 6월에 출근을 할 때조차 고글과 마스크를 준비하지 않으면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관지가 약한 나와 아들은 힘겹게 여름을 맞았다. 산과 숲이 없는 T 시에 황사는 밤 사이에도 멈추지 않았다. 자고 나면 창틀 사이로 붉은빛 고은 모래가 잔뜩 쌓여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틈 만 나면 중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10월에 있는 1주일 간의 국경절은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였다. 우리는 청도, 상해, 소주, 항주를 거쳐 홍콩을 마지막 일정으로 하는 여행 계획을 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엄두도 나지 않는 용감한 행동이었다. 언어도 능통하지 않았고 안전도 확실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가족 홀로 다녔다. 전체 여행 계획을 나 혼자 짜고 항공권과 기차표, 숙소를 예약했다. 지금처럼 인터넷 예매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였고 공항에 나가거나 기차역에 나가면 시간이 멋대로 변경되고 항공편이 취소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동할 때는 항공편을 이용하거나 16시간을 타고 가는 침대 기차를 타기도 했다. 숙소도 호텔, 호스텔부터 각국의 여행객들이 머물면서 정보를 나누는 게스트하우스에서도 보냈다.
우리가 국경절 연휴 첫날 T시를 떠날 때는 가벼운 패딩 파커를 입고 출발했다. 일교차가 심해서 10도 에서 17도 사이를 오르내렸다. 중국은 넓었다. 소주와 항주는 아름다웠다. 서호에 석양이 지고 호수를 둘러싼 작은 전시관들에 조명이 켜지면 도시가 거대한 박물관이 되었다. 하루 종일 돌아도 다 못 볼만큼 각양각색의 전시관이 많았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에 도착한 홍콩은 거대한 온실 같았다. 약 28도의 후덥지근하고 습도가 높은 홍콩 공항에 내린 우리 가족은 반팔을 입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파카를 입고 서있었다. 첫 목적지였던 홍콩의 리펄스베이 바닷가에 도착했다. 모래밭을 걸으면서 수영복을 입고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과 수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황사를 뒤집어썼고 조금 전에는 겨울 파카를 입고 비행기에 올랐던 우리를 떠올렸다. 우린 하얀 백사장과 푸른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보면서 이 아름다운 도시에 매료 됐다.
무사히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T시로 돌아왔다. 이 흥미진진하고 즐거웠던 여행의 추억에서 우리 가족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곳은 홍콩이었다. 하얀 백사장과 출렁이는 파도, 아름답고 화려한 홍콩의 야경이 눈에 아른 거렸다.
이 시즈음에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터졌다. 이 일로 근 한 달을 학교와 교민 사회는 몸살을 앓았고, 두 명의 교사가 다음 해에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나였다.
* 이 글은 2000년대 초반 제가 근무했던 때의 일을 적은 것 입니다. 지금의 학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먼 옛날의 일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