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크는 아버지 10화

by 순례자

나는 K교장과 약속한 대로 2월 17일에 중국의 T시를 떠나 H국의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가 떠날 때 T시는 영하 6도였다. 두툼한 파커와 장갑으로 겨울로 무장했다. H국에 가까워지자 기장은 현지 날씨는 맑고 영상 20도라고 했다. 약 3시간 40분의 비행으로 맑고 푸른 하늘을 만나고 늦봄의 날씨로 바뀌는 상황이 신선했다.


이제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서 사는 것이다. 두근거렸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삶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교사 10년 차쯤 되면서 삶에 변화가 필요했다. 역마살이 있던 내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삶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새로운 거리, 새로운 문화, 낯선 사람들 속에 섞여 살고 싶었다. 이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짐을 찾아 출국장으로 나오자 K 교장이 A4 용지에 학교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섰다. 혼자 마중 나와 있었다.


“ 선생님 오느라 수고 많았소. 여기는 공항버스 타고 가는 것이 편해. 트렁크 하나 이쪽으로 줘요.”

“ 교장 선생님이 직접 나오셨어요? 제가 혼자 찾아갈 수 있는데요.”


처음 와 보는 곳이다. 2층 공항버스는 약 1시간가량 작은 도시의 도로와 도로 사이를 절묘하게 굽이쳐 지나갔다. 좁은 거리의 밀집된 도로와 건물 사이를 스쳐갈 때는 건물에 부딪힐 듯한 아찔함을 느끼기도 했다. 운전 실력이 기가 막히다. 서울에서도 볼 수 없었던 높고 화려한 마천루 빌딩 사이를 지나기도 하고 50년은 족히 넘었을 낡고 빽빽한 아파트 촌 사이를 번갈아 지나치면서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멈춰 섰다.

복합 쇼핑몰 같은 큰 건물 옆에 섰다. 몇 갈래의 고가도로가 엿가락처럼 뻗어있다. 양쪽으로는 높은 아파트 건물이 바위 산에 층층이 들어서 있다. 교장은 트렁크 하나를 끌고 내리막 길로 앞장서 걸었다. 그 뒤로는 내가 그리고 아내와 아들이 뒤를 따랐다. 해 질 녘의 태양이 눈부시게 비치고 2월인데도 늦봄 같은 햇살이 따스하게 내렸다. 엷은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이 상쾌했다. 10분 남짓 도로와 건물 사이를 걸어서 횡단보도를 2개쯤 건너고 지하도를 지났다.


흰색 페인트 칠에 어린이 벽화가 그려진 담장과 약 4층 정도의 잘 정돈된 예쁜 학교가 나타났다. 입구에는 H한국국제학교라는 청동 명패가 붙어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자 바닥에 새파란 실리콘폴리우레탄이 깔린 아담한 운동장이 나왔다.


“우리 학교입니다. 이제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 짐을 놓고 행정실장을 만납시다. 곧바로 미리 계약한 집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규모가 큰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학교는 첫눈에도 환경과 시설이 훌륭했다. 건물 1층에는 사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사계절 사용할 수 있는 넓은 수영장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여서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교장의 안내에 따라 식당을 지나 뒤 운동장으로 연결된 통로 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교무실에 내렸다. 직선과 혼합된 반구형으로 완만하게 굴곡진 건물이 재밌다. 지나치다 본 교실도 깨끗했다. 교무실도 깨끗하고 공간도 넓었다.


중국의 T한국학교는 중국현지 중학교를 임대해서 사용한 노후된 공장 건물 같은 곳이었다. 한국과 비교해도 낡고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런데 H학교는 한국학교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좋았다. 내 자리로 안내받았다. 트렁크를 자리에 놓았다. 교실을 돌아 옥상에 올라갔다. 옥상은 테니스코트와 농구장으로 사용했다. 넓은 바다가 학교 바로 옆에 있었고 그 건너편으로 또 다른 아파트 주거지가 있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교장은 퇴근했다. 잠시 후에 한국인 행정실장이 나타났다. 훤칠한 키에 부리부리한 눈, 시원시원한 말씨에 말 수완이 아주 좋았다. 내가 농담으로


"영화배우 최민수 씨가 걸어오는 줄 알았어요."

"가끔 그런 소리 듣습니다. 머리가 좀 벗어진 최민수지요."


라고 하며 통성명을 했다. 얘기하다 보니 대학교 동문이었다. 이후로그는 나를 ‘후배님’이라고 불렀다. 계약한 집으로 안내했다. 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처음 버스를 내렸던 곳에서 5분 거리에 가까운 곳이었다. 지하철역이 연결된 아파트였고 바로 앞에 대형 쇼핑몰이 있었다. 도로에는 버스와 함께 트램이 지나다니는 정겨운 풍경이다. 이곳의 집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가구와 가전이 빌트인이 되어 있어서 살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행정실장이 집 앞에서 저녁을 사줬다. 일식 초밥에 맑은 된장국을 먹었다.


“후배님 잘 오셨습니다. 저는 이곳에 온 지 14년 정도 됐어요. 처음에는 직장일로 왔다가 퇴직하고 사업을 하다가 이곳 행정실장을 하게 됐어요. 이곳은 살 만한 곳입니다. 어찌 보면 한국보다 살기가 더 편해요. 비싼 집값만 아니면 말이지요.”


행정실장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18평 남짓한 나무마루가 깔린 작은 집. 기억자로 꺾인 직사각형의 집이 신기했다. 문을 열면 거실에 소파와 TV, 각 방마다 벽과 창에 설치된 작은 에어컨, 붙박이장이 단정하게 잘 정돈된 집이다. T시에서 살았던 집의 절반 크기인데 월세는 3배로 껑충 뛰었다. H국의 집세가 실감 났다.


당시 한국정부는 해외 16개국에 33개의 국제학교를 잇달아 설립했다. H한국학교는 1988년에 국제도시의 특성에 따라 유일하게 한인회와 교육부의 공동 운영체계로 설립됐다. 나머지 32개 한국국제학교는 현지 주재원 자녀를 대상으로 한 한국어교육과정만 운영했다. H국만 한 캠퍼스 안에 한국인 대상으로 한 한국어과정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국제부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국제부 과정은 외국인 교장을 두었고 30여 개국에서 온 180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


당시 H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 캠퍼스 건물 안에 있고 약 160여 명이 재학하는 작은 규모의 학교였다. 정부에서 파견된 교장과 교감 1명과 현지채용 교사로 운영되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초등과 중등에 초빙교사를 선발한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초등에 1명, 중등에 3명이 선발됐다. 초빙교사란 한국의 정규교사가 교육부 인가 학교에 전보, 임용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립학교에 임용되는 것으로 원적교에 복직할 때는 모든 경력을 인정받는 제도이다.


아내와 아들은 새로 전학할 학교가 퍽 마음에 든다고 했다. 바닷가를 등지고 새 둥지처럼 주택가가 둥그렇게 둘러싼 아늑한 느낌이다. 학교는 깨끗하고 세련된 외양에 흰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진 건물이 청량감까지 들었다. 우리 가족은 그날 밤 식탁에 둘러앉아서 차를 마시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새로운 삶의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물론, T시에서의 삶도 좋았다. 내 유년 시절로 시간을 되돌린듯한 흑백의 풍경들과 친절한 동료 교사들 그리고 정감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헀던 그 활달하고 즐거운 시간들은 잊지 못할 것이다. 여유롭고 평온한 시간이었다. 적어도 황사와 학부모와의 갈등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제 전혀 환경이 다른 세상에서 첫 발을 내디뎠다. 마치 시간여행을 한 느낌이다. 지금 내가 섰는 이곳은 한국보다 오히려 10년은 앞서 있는 것 같았다.


* 이 글은 2000년대 초반 제가 근무했던 때의 일을 적은 것 입니다. 지금의 학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먼 옛날의 일임을 밝힙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