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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을 적다가

by 순례자

약력을 적다가


비탈진 숲길을 한참 오르다가

숨 돌리고 앉은자리에서

배롱나무를 만났다.

나무 그늘만큼 드리운 자줏빛 낙화 위로

어제 떨어진 꽃도 새로 나온 꽃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꽃은 누가 보라고 피는 것이 아니라고

아무도 모르게 백날을 꽃피운다.

내 살아온 발자취를 적으라는

종이를 앞에 놓고

수십 년 세월을 거슬러 서성대다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꽃은 제 홀로 떨어져 주단을 펼쳐놓는데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낙엽처럼

흩어진 날들에 반짝이고 우쭐댈만한

꽃다운 기억이 없다.

아침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면

먹고, 살고, 자식 키우며 일하고

숲 속을 거닐었던 나날이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쓸 순 없겠지


아무도 눈길 주지 않겠지만

내 인생의 아득한 능선을 건너오면서

슬픔과 어리석음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밤에도

가슴속에 하얗게 반짝이는

희망의 샘 줄기를 품고 온 사람이라고

한 줄로 약력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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