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해질녘, 6월과 10월
연말과 연초, 그리고 시계.
모두 시간의 흐름과 관련이 있는 단어들이다. 이 세 단어들과 아주 가까이 머무르고 있는 지금이 딱 이와 관련된 글을 쓰기에 제격이다.
연말은 항상 어딜 가나 들떠 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한 달 전부터 여기저기 만연해 있는 트리나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길을 걷다 보면 캐럴이 들리는 낭만은 놀랍게도 이번에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어느 식당이나 카페를 들어가도 캐럴이 나오는 건 변치 않았다.
연말은 왜 항상 떠들썩한 것일까? 다들 온종일 시계만 보며 사는 것도, 달력을 구비하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물론 요즘은 핸드폰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긴 한다만- 일 년 동안 부리나케 달리느라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장거리 달리기의 결승점이 보이는 때의 짜릿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 같다.
올 한 해도 고생 많았다고, 이제 벌써 2025년이라고, 무슨 첨단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해괴망측한 망언도 관대하게 하하 호호 웃으면서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반면 연초가 되면 수중의 공기를 새로 주입한 것마냥 상쾌해진다. 미세먼지 농도의 변화는 안타깝게도 연말연초와 무관하게 흘러가지만 코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모든 공기가 마치 새것 같다.
달력을 새로 들이는 것, 나의 공간을 새롭게 재정비하는 것. 그런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마음가짐을 달리 갖게 한다. 신년 맞이 계획을 새로 세우고, 다이어리를 사고, 일기 등으로 꾸준히 기록하겠다는 다짐도 매년 다시 한다. 어찌 보면 무언가를 새롭게 다시 한다는 것은, 낡은 것을 치우고 낯선 것으로 채운다는 것은 불편하진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연말과 연초를 특별하게 인식하고 변화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참 괴로워한다. 들뜨는 마음가짐도, 새로운 것들도. 내겐 꽤나 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년, 그리고 특별한 주기 없이 나는 꾸준히도 새로운 환경에 나를 놓는 것을 지향하는데, 그것은 나의 성향과 정반대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내 공간, 시계, 계절, 그리고 하늘 같은 것들이 내게 편안함을 선사한다는 것도 깨달은 지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연말과 연초도 나는 일 년 중에서 가장 마음 한편이 불편한 시간들이다. 변화하더라도 내 속도에 맞춰서 찬찬히 바뀌고 싶은데. 혹은 준비운동이라도 하고, 준비자세를 갖춘 후에 달리고 싶은데 시간은 너무나도 공평하고, 사회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지대하여 나를 불안하게 하고 유독 무거운 변화라고 받아들인다. 마치 격변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든다고나 할까.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지 말고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만 있다면 뭐 이쯤이야, 불편한 시간들에 코웃음을 쳐줄 수도 있겠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럴 준비를 온전히 하지 못한 것 같다. 찬찬히 내 속도에 맞춰 적응해 가겠지. 익숙해지기 전에 기록해 두려는 발악도 어찌 보면 나의 본성일지 모른다.
시간의 흐름은 주기에 따라 분류 기준도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온종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계를 떠올려보자. 연말과 연초를 특별하게 인식하는 건 마치 시곗바늘이 자신의 시간에 똑같이 고유하게 멈추고 흐르며 같은 시간만큼을 배정받았으나, 특별한 시간만을 편애하는 것과 같다. 그럼 다른 숫자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할까. 시간들은 모두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시곗바늘은 정 가운데에 멈출 수도 없는데, 반드시 그 자리들을 지나는데.
그 친구들이 외롭지 않길 바라는 나는 애매한 주기를 참 좋아한다. 예를 들면 새벽녘, 해질녘, 6월과 10월. 누군가는 자다 깼는데 아직도 새벽, 온종일 깨어 있었는데 아직도 오후 4시, 한 해가 시작한 지 오랜데 아직 반년도 안 된 6월, 일 년이 지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10월.
그 누구도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하고, 변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 평온한 때. 나만의 보폭으로 변화할 태세를 갖추는 때. 그 변화하는 모습이 비록 한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차곡히 쌓이는 그 순간들을 사랑한다.
연말, 연초도 아니고 밥 때도 아닌 그 애매한 타이밍들은 만나면 반갑고, 오래 볼수록 사랑스럽다. 그러니 부디 문득 이 글이 떠오르는 순간, 그냥 가볍게 미소 지으며 별 것도 아닌 것에 자그마한 의미부여를 해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