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든 것 중 가장 생동적인 작품
날이 좋아서 친구와 처음으로 한강 나들이를 나갔다. 슬 해가 지고, 주변이 캄캄해졌다. 하나 둘 밋밋했던 건물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야. 야경 죽인다. 다들 이거 때문에 한강, 한강 하는구나.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를 잠시 멈추고 한강의 풍경을 감상했다. 빛나는 불빛들과 물에 비쳐 일렁하는 풍경이 참 예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이 야경은 만든 것도, 보는 것도 다 우리네.”
그랬다. 야경은 인간이 만든 것 중에 가장 생동적인 작품이었다. 밤에 불빛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도, 그 불빛이 꺼지지 않고 늦은 저녁까지 반짝일 수 있는 이유도.
가만히 바라보다 보니 저 안에서 사람들은 뭘 하고 있을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직장에서 고뇌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 가정에서 화목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때 빠르게 지나가는 지하철 안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세상에. 한 가지 깨닫게 된 건 빛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있어야 빛은 꺼지지 않고 계속 켜져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참으로 황당한 일인 거다. 그들 개개인은 그 빛이 너무 가까워서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그들은 모두 빛나는 존재인데.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찰나에 이미 빛나고 있었다.
멀리서 나를 바라본 게 아닌데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창밖에서 바라본 나도 저들처럼 누군가의 눈에서는 빛나고 있을까?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누르고 불현듯 불안이 덮쳤다. 에잉, 그렇다고 한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가까이에서 비극인 삶이 무슨 의미가 그리 있겠는가.
어두컴컴한 와중에 라면을 끓여 왔다. 보글보글 라면 기계에 끓여 왔더니 면의 익힘이 완벽하다. 후루룩 목구멍을 넘어가는 탱글한 면발의 식감이 목젖을 탁 친다. 국물을 한 숟갈 맛보면 얼큰함이 일품이다. 이 맛이야. 날이 많이 시원해졌다고 한들 아직 날은 후덥지근하다. 이마에 송골 맺히는 땀방울에 몸의 독소가 빠져나가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래. 이렇게 빛 하나 없이도 어둠 속에서 행복하다면 이거야 말로 희극 아닐까? 멀리서 보면 새카만 이것이 비극처럼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비극을 맞이했을 때 저 멀리서 바라보는 누군가의 눈에는 희극일지도 모른다는, 한 점이 된 순간들이 모인 그곳에는 작품처럼 내가 자그맣게 빛나고 있을 거라는 호기심, 의구심, 그런 무형의 신념 같은 게 마법처럼 희극을 가져와줄지 누가 알겠는가.
눈앞에서 하나 둘 불빛이 줄어든다. 그럼 또 다른 모양의 그림이 그려진다. 별자리를 찾듯이 빛을 따라 손을 그어본다. 이 모양새 같기도 하고, 저 무늬 같기도 하고…
“마치 날개 같아. 날아갈 것만 같아.”
“그래? 나는 하트라고 생각했어. 사랑이 넘치게.”
사람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르고, 그렇기에 개인에게 다가서는 울림의 정도도 다르다. 어떤 야경이든, 어떤 해석이든 중심에는 늘 나 자신이 있다. 희극의 중심에도 비극의 중심에도 언제나 당신이 있다. 그러나 그 야경을 무엇으로 해석할지도 당신에게 달려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