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기억의 미화,
언젠가 친구들과 만나면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 그랬잖아. 진짜 재밌었는데. 진짜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친구들과 자주 만나지 못하면 못할수록, 대화 주제는 늘 하나로 귀결된다. 함께 나눈 소중한 추억.
예전에는 문득문득 친구들을 만나면 요즘 뭐 하고 있는지 묻고 무얼 더 하고 싶은지 희망에 가득 찬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나중에 뭐 하고 싶어?"
그 질문이 설레는 질문에서 실례로 변한 건 삽시간이었다. 불편한 질문은 공기를 얼어붙이고 입장은 거북해진다. 그럴 때면 기분을 전환시키기 좋은 대화주제가 준비된 것마냥 툭 튀어나온다.
“야, 그거 기억나?"
지나간 기억은 우리의 곳간에 켜켜이 쌓이는데, 기억들은 더 무거운 짐을 지탱할수록 미화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상사에게 깨진 날이 켜켜이 쌓이면 처음 혼난 날쯤은 별 거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왜 기억은 미화되는 것일까? 기억은 미화될수록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흘렸던 땀을 질척하고 냄새나는 것으로 기억하기보다는 그 땀으로 얻어낸 것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청춘이었다며 빛나는 땀방울을 상상하는 편이 더 행복하지 않은가?
사람은 만성적으로 결론을 찾으려는 버릇이 있다고 생각한다. 피나는 노력 끝에 맺힐 '결실'에 집중하려는 못난 버릇이 있다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자기암시하는 경우도 다분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과거의 노력들은 결과가 있었기에 빛이 날 수 있던 것이다. 즉, 노력하는 동안 고됐던 순간들을 미화시키기 위해서는 기필코 결말이 필요하다. 그 결말이 새드엔딩이든, 해피엔딩이든.
추억은 참으로 신비한 것이다. 과거에도 존재하고, 현재에도 존재하며,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래에는 얼마나 더 휘황찬란한 주연이 되어있을지 기대되기도 한다. '추억'이란 용어마저도 낭만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다. 자동으로 색이 바랜 배경음이 흘러나오는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재생한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맞아, 그때 참 좋았지. 하고 지금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데에서 끝을 맺는 지경에 이른다. 이 결말은 새드엔딩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편이 더 즐겁지 않을까? 아직 나는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아직 내 노력은 결실을 맺지 않았다고, 그렇게 믿고 새드엔딩으로 다급하게 막을 내리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직 막을 내리기엔 너무 이르다고. 언젠가는 반드시 해피엔딩을 맞아서 지금 이 순간도 미화된 추억으로 남길 바란다고. 그렇게 되면 미래를 얘기하는데 두려움이 좀 가시려나.
지나치게 미화된 기억에 이름을 붙이자면 명왕성일까. 아니지, 이제는 134340일까.
왜소 행성 중에 하나인 명왕성처럼 지나간 기억들은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곁에 맴돌 뿐이지만 그것들은 때때로 대화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그 덕에 위안을 얻기도 한다. 먼지가 쌓인 그 추억들은 먼지가 쌓여서 더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태양계에서 버젓이 한 자리를 꿰차고 있을 시절의 명왕성에게 누가 관심이라도 줬던가.
그러니 지금의 힘듦도 언젠가는 세월이 흘러서 먼지가 쌓이고, 색이 바래면 그런대로 미화되어 추억으로 남을 거라고. 그러니 너무 애쓰지도, 너무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그냥 미래의 행복할 나를 상상하기만 하자고.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던질게.
“너는 뭘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