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낮은 곳

가느다란 사랑은 끊어지기 마련이다

by 집안의 불청객

누군가는 위에서 낮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과 을이 존재했고 을은 낮은 곳에서 갑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명령이든 부탁이든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갑에서 나오는 말은 거의 절대적이었으며 사실상 복종해야 했다.


갑과 을은 바뀌기도 했지만, 쿠데타는 언제나 실패했다. 연애가 어느 새부터인가 주도권 전쟁으로 바뀌었다. 나와 그녀는 언제나 위에 올라가려 노력했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서로의 배려, 양보가 존재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약간의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연락, 친구, 술자리, 담배 등을 통제했다. 허락을 받아야 했다.


대부분은 허락해 주었으나 나는 이 행위 자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왜 그녀가 나를 아래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은 따진 적이 있다. 그녀에게 논리는 통하지 않았다. 감성적으로만 호소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제대로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그녀를 달래주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달래주는 것도 일이었다. 그녀의 푸념은 매일 새로웠다. 어느 날은 동기가 싫다고 하거나 학점이 좋지 않다거나 그것 외에도 많았다. 그런 것들을 들을수록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말과 행복한 얘기를 해도 부족할 판에 매일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니, 공감대도 떨어지며 지쳐갔다.


그런 티가 났는지 대화 중에 그녀는 나에게 피곤하냐고 물었다. 실제로도 피곤했지만, 그녀의 말이 더욱 가미시켰다. 무슨 대답을 내놓아야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다시 피곤하냐고 물었다. 하루쯤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오늘은 좀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감정적으로 호소하며 사랑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나는 져주어야 했다.


연애의 중반기쯤에 들어서는 이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시간을 가지자는 말했다. 말을 꺼내면서도 약간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싫다고 했다. 정말로 싫다고만 계속해서 말했다. 설득하기 위해 기간을 점점 줄였다. 처음에는 이 주 그다음은 일 주 그다음은 오 일이었다. 오 일로 타협을 보고 통화를 끊었다.


닷새 동안 자연스러운 나를 볼 수 있었다. 누구에게 억압받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근데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그녀 생각이 났다. 다시 생각을 한 번 더 해보니 내가 제일 싫어하던 느낌인 위에서 낮은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런 내가 혐오스러웠다. 잘못됨을 느꼈고 다시 되돌리는 방법은 그녀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원래대로 지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오 일이 끝나고 그녀에게 다시 연락했다. 우리가 무슨 관계였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앞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을 덥석 믿고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위태위태한 연애를 시작했다.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은 잠깐이나마 우리를 불태웠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낮은 곳으로 끌어내려고 발악했고 더러운 경쟁이라도 하듯 위로 올라가려 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둘 중 하나는 상대보다는 위에 있지만 절대적인 위치는 수직으로 하락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연애 밑바닥 끝이 보였다.


밑바닥의 끝은 서로에게 있어서 순위가 밀려나는 것이다. 연애라는 틀에서 형식상으로는 벗어나지 않았기에 최소한의 관심만을 보인다. 그 관심은 좋은 쪽은 아니다. 서로의 능력을 깎아내리고 자신감을 하락시키며 위축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더욱 불행한 것은 이제 그것에 지쳐 수긍하게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낮은 곳을 바라본다는 게 참으로 무섭다. 자신이 위인 줄 알고 생각하고 하는 행동도 위험하지만, 높은 곳을 올려다보는 이의 심정도 처절하다. 좋을 거 하나 없는 서열 싸움이고 연애가 아닌 마치 노예와 주인 정도의 관계다.


낮은 곳에서도 높은 곳에서도 쳐다본 적이 있는 내겐 다시는 연애 같은 것을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적어도 연인은 그런 수직적인 관계를 지양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낮은 곳도 높은 곳도 없어야 그제야 우리는 그걸 연애라고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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