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빛 물든 아름다운 농촌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곳
지리산 둘레길을 벗어나 우리가 달려온 곳은 수지면 양촌마을이다. 몸이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으나, 아름다운 농촌 풍경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남원시 수지면 고평리에는
진곡(眞谷), 마륜(馬輪), 고정(考亭), 양촌(良村) 4개의 마을이 있다.
양촌 마을은 '가랑수', '점터' 또는 '양촌'이라 했으며, 죽산 박 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마을 앞산 앞 명당을 갈음수라 불렀다고 하는데, 갈음수(渴飮水)의 발음이 와전되어 '가랑수'라 하다 '양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양촌마을에는 진입로가 두 곳인데, 우리가 안내받아 오른 길은 계곡을 끼고 있어 운치도 있고 풍광도 아름다웠다.
둘레길 마지막 코스였던 장항마을 당산 소나무 도착 무렵부터 내 폰 카메라가 작동하질 않았다.
빼어난 소나무의 자태도 사진 속에 담질 못했는데, 양촌마을 풍경도 찍지 못하고 바라만 보니 속상했다. 이런 예상치 않던 일이 생기는 게 싫다.
자연스레 발걸음도 처지고, 몸과 마음은 더 축 내려앉는다.
습관처럼 눌러대던 손가락이 할 일 없이 축 늘어져 있다 보니 몸과 마음도 함께 넋 놓고 멈춤 한다. 남원 여정 내내 손바닥에 착 붙어 지냈던 폰이 얼마나 중요한 한 축을 지탱해 왔는지 새삼 확인한다.
브런치 글에도 여행 스케치를 올려보겠다고 쉬지 않고 달려오던 여행길이 도중에 딱 막혀 그냥 멈춰서 버린 기분이 들었다.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양촌 마을 진입로를 따라 1km쯤 걸어가면 완만한 경사로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대한 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인 용주암은 왼쪽으로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계속 따라가면 저수지가 있다.
일행은 마을 가장 끝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저수지까지 다녀들 왔지만,
나와 한 명은 너무 피곤해서 중간에 슬그머니 멈춰, 바위 위에 꼼짝 않고 앉아 지친 다리를 쉬게 했다.
당시 보살 한 분이 사찰 길 건너편에 있던 정원 식물에 물을 주며, 물청소까지 하고 있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근처 바위에 앉아 쉬었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나보다 더 쉬고 싶었던 내 폰 카메라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 사진 대신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곳이다.
저수지 풍경도 멋있다고 하던데, 직접 올라가 가보지 못해 아쉬웠다.
이제야 지도를 검색해 보니, 꽤 커 보이는 마곡 저수지가 눈에 띈다.
당시엔 너무 피곤해서 이런저런 정보조차 메모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좀 쉬고 나니, 내 폰 카메라도 다시 작동해서 조금 놀랐다.
1시간 넘게 카메라가 열리지 않던 고장 원인은 모르겠으나, 지리산 둘레길에서 너무 많은 사진을 찍어댄 탓인지, 내 폰 카메라도 나도 너무 피곤해서 정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시골이어서 다음날 A/S 받을 곳을 찾아 멀리 나서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던 마음이 편해졌다.
그 후, 별 탈 없이 폰 카메라는 지금까지 잘 작동되고 있다.
함께 있던 일행도 그냥 이상하다고 고개 한 번 갸우뚱하고 에피소드로 끝났다.
피곤은 남아있지만, 카메라가 작동되기 시작하자, 나도 다시 힘을 받는다.
마을회관으로 내려올 때는 노을빛 물든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몇 장 사진 속에 담으면서 슬며시 열정이 조금씩 살아났다.
이곳에 귀촌한 관광학과 출신의 젊은 분(40대는 시골마을에선 진짜 귀한 젊은이)이 지는 해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풍경 속에 나를 담아 주어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추억의 사진을 선물 받았다.
한동안 하릴없이 늘어져 있던 손이 지는 해를 잡기 위해 잠시 바삐 움직이며 행복했던 순간!
마을회관 안으로 들어서자, 우리를 환영하기 위한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와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반겨주시다니, 피곤에 지친 몸을 끌고 방문한 것이 오히려 송구스러웠다.
양촌마을과 우리의 인연은 지난 5월 13일로 거슬러간다.
이날 양촌마을 가량수 협동조합 박해룡 사무장은 서울시 도심권 50 플러스 센터 강의실에서 '남원에게 듣다' 강의를 했다.
강의를 들으면서, 이렇게 열정이 넘치는 강사도 흔치 않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강의실 분위기가 좋았다.
박 사무장은 서울시 교통공사에 근무하던 중, 2006년 아내가 수술하기도 늦었다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아내를 요양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물 좋고 공기 좋은 장소를 찾다가 양촌마을에 정착했다.
죽산 박 씨 집성촌에서 주민들에게 현지인으로 인정받고, 지금은 현지인보다 더 현지인이 되어버린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다. 집성촌은 텃세가 심하다는 선입견을 다 부숴버린 그의 능력과 경험담이 무척 궁금했던 첫 만남이 생각났다.
강의는 남원 정착기 및 준비과정, 남원의 매력, 일과 활동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귀촌생활 16년간 박 사무장이 몸소 체험했던 이야기를 아낌없이 풀어내면서 우리의 열렬한 호응을 받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부인도 완치해서 건강한 시골생활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설마?" 하며 탄식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가 남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양촌마을 분들이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이다.
역시! 남원은 맛있다.
양촌마을 분들의 정성 가득 담긴 한 상은 그중 최고였다.
추어탕이 국물이 이렇게 진하다니! 그 투박한 맛이 놀랍다.
지리산 생막걸리는 살짝 입술만 축였지만, 걸쭉하고 진한 맛이 향기롭기까지 했다.
이장님과 주민분들의 환영을 받아가며 정성 가득 담긴 진한 남원 추어탕을 맛있게 먹고 나니, 피로까지 쓱 가셨다.
박해룡 사무장은 양촌마을의 기획자이며 실천가이다.
마을 어르신인 이장님도 박 사무장을 믿고 적극 지지하고 있다. 그는 양촌마을의 일꾼이자 보물 같은 사람이다. 박 사무장은 가량수 협동조합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리더다.
협동조합이 구성된 것은 작년이다. 아직 초보 수준이지만, 벌써 식용 꽃 메리골드를 키워 메리골드 김부각을 만들어 팔고 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특화된 상품이다.
박 사무장은 올해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 중 특히 마을식당과 카페 운영을 꼽는다.
식당과 카페를 만들어 일자리도 만들고, 마을 수익도 창출해 내겠다는 계획이 그의 긍정적인 열정으로 더욱 밝아 보인다.
잘 쉬고, 잘 먹고, 좋은 이야기도 듣고 나니 시간만 급히 흘러 마을 전체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우리도 어서 고운향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며 나섰다.
따듯하게 배웅해 주신 주민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가득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