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과 관 6천여 명, 군 4천여 명의 시신을 한 무덤에 묻고, 묘역 조성
만인의총(萬人義冢)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맞서 항전하다가 전사한 군, 관, 민을 합장한 무덤으로 남원시 향교동에 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 막바지, 조선과 왜군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일어난 왜란이다. 호남 점령의 실패가 임진왜란의 패인이라 판단한 왜군은 우선 전라도 지역을 탈취하기 위해 11만 대군을 이끌고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은 남원성을 공격했다.
왜군은 남원성을 겹겹이 에워쌌고, 4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남원 시민 6000여 명을 포함한 1만여 명이 모두 순절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국충정으로 나라를 지키다 순직한 시민 6천여 명, 병사 4천여 명의 시신을 한 무덤에 묻고, 묘역을 조성했다.
1612년(광해군 4) 충렬사를 건립, 8 충신의 위패를 모셨으며, 1653년(효종 4) 사액(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받았다.
1675년(숙종 1)에 남원 동충동으로 이전됐다.
1879년(고종 8) 사우(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가 철폐되어, 제단을 설치하고 봄가을에 향사(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는 의식)를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단소(제단 있는 곳)가 파괴됐고, 재산까지 압수당한다.
제사도 금지당했다가 해방 이후 다시 사우를 일으키고 제사를 모시게 된다.
일제로부터 독립이 됐고,
1963년 당시 박 대통령의 지시와 남원군과 군민이 합심,
1964년 원래 모셔졌던 옛 남원역 자리에서 흙을 퍼왔고, 지금의 왕봉산 기슭에 모시게 된 것이다.
1973년에는 의총 앞 사당에 ‘만인’의 위패가 모셔졌으니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후 376년 만의 일이었다. 이때까지 이분들을 위한 사당도, 위패도, 제사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채 살아남은 자들의 바쁜 세월만 무심하게 흘러왔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 사적으로 재지정됐다.
만여 명이라면, 지금도 많은 사람의 수다.
당시 남원읍에서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려다 왜구 의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울분이 솟는다.
경계가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이웃이라는 나라가 항상 우리를 넘보며 침략질을 해온 것도 부족해서, 지금까지 일관되게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을 보면, 항상 마음이 불편하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면 아쉬움이 크지만, 어떤 나라든 태평성대만 누리며 발전해 오진 않았으니, 작은 위안이 된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을 보아도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이웃이 가장 악랄한 침략자가 아닌가!
충렬사 오르는 길
홍의문을 들어설 때, 동입서출(東入西出) 한다.
우리나라의 능, 향교, 사당 등을 출입할 때는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서쪽(외쪽)으로 나온다.
하필 우리가 방문했던 5월 26일(목), 충렬사 좌우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충렬사 뒤쪽 계단으로 오르면 만인의총 묘가 있지만, 공사하는 분들을 피해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돌아섰다.
마음으로 예를 다했으니, 그리해도 될 것이다.
왼쪽(서쪽) 문으로 나서기 위해, 성인문을 향해 걷는다.
이곳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숙연한 마음을 품고 조용히 걷게 된다.
파란 하늘가로 그런 우리 마음이 닿는다.
싸리골, 소머리 곰탕
쑥고개 로에 있는 '싸리골'에서 소머리 곰탕으로 조금 늦은 점심 식사를 한다.
남원에서는 나름 유명한 곳이다.
1999년 영화 <춘향뎐>에 출연했던 조승우, 이효정 배우와 임권택 감독의 사인이 벽에 걸려있다.
벌써 20여 년도 넘게 훌쩍 지난 시간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이라니, 참으로 빠른 세월이구나!
우리는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식물원 카페 '아담원'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