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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Aug 31. 2023

부엌칼

그 후, 나는 부엌칼과 가위를 갈지 않는다.

부엌칼은 부엌에 있어야 한다.

이 도구는 주방에 모셔두고 야채를 다듬고, 자르고 채를 썰 때 사용한다.  

좋아하는 냉동 조기 비늘을 벗겨내고, 모양 좋게 구워지도록 칼집을 내주기도 한다.

있어야 할 곳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는 귀한 도구다.

아무리 잘 잘리던 부엌칼도 몇 년 쓰다 보면 무디어진다.

50대 주부였을 때만 해도 동대문 시장까지 부엌칼과 가위를 직접 들고나가 새것처럼 갈아오기도 했다.

재료에 갖다 대기만 해도 쓱 잘렸다.

이런 칼은 더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부엌칼도 칼은 칼이니까.

손 아래 동서가 손바닥 위에 작은 사과를 올려놓고 잘 드는 과도로  반을 손쉽게 자르려다 손바닥을 다치기도 했다.

심하게 잘려 속 피부 겉 피부를 각각 따로 20 바늘 정도씩  꿰맸던 것 같다.

상처가 아무는 데도 오래 걸렸다고 들었다.

올케언니도 바삐 조리를 하다, 싱크대 위에 걸쳐놓았던 칼이 하필 발 위에 세로로 떨어져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가까이서 이런 일들을 실제 전해 듣다 보니, 성능 좋은 칼에 대해 은근 거부감이 생겼다.



그 후, 나는 부엌칼과 가위를 갈지 않았다.

부엌칼은 무디어진 채로 계속 사용하고 있고, 가위는 2~3년마다 한 개씩 더 사서 최고 등급을 부여하고, 가장 안 드는 가위를 한 개  골라서 버렸다.

조리를 준비하다 보면, 어쩌다 이 무디어진 부엌칼에 베이듯 눌리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자국만 남고 상처는 없다.

과도를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파서 들여다봐도 눌려진 자국만 남아 있다. 얼마나 무디어졌는지!

우리 집 부엌칼은 잘 잘리지도 잘 깎이지도 않지만,  할머니가 된 내겐 안전한 도구다.


빈 공간을 채워주는 셀룰로오스 스웨덴 행주 


최근엔 부엌칼이 부엌 밖으로 나와 흉기로 쓰이는 세상이 되었다.

부엌 냉장고 냉동실 안에서는 영아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끔찍했다.

도구를 잘못 쓰는 사람들이 별안간 많아진 걸까?

삭막한 세상에 사악한 흉악범이 늘어나기도 했겠고, 분초를 다투며 시시각각 뉴스를 전하는 매스컴의 위력도 가세한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도 '세계 최고의 치안 안전국가'에 산다는 긍지가 있었다.

따뜻한 볕이 바로 드는 '다이내믹 코리아'의 국민!

남녀노소  빈부의 차이라는 음지가 여전히 존재했지만,

안전한 나라에서 다양한 문화의 가치를 누리며 산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죽는 날까지 우리나라가 문화 강국이 되길 염원하셨던 백범 선생의 말씀도 현실이 되지 않았던가.


발전의 속도가 머뭇거리는 요즈음이다.

방사능 오염을 걱정하게 되니 전복도 꽃게도 부엌칼로 손질할 일이 줄어든다.

생각어떤 흉기로 아프게 찔리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일상이 퇴보하는 것 같다.

희망의 끈이 풀린 기분이다.  

각자도생 하면서 자기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나?

역사는 늘 되풀이하며 흘러왔다.

멀리 길게 보며 살고 있다.

결국 일상도 바른길로 선회할 것을 믿는다.

방방곡곡 다시 따뜻한 볕이 가득 들어찰 것이다.

그렇지만

방사능으로 오염되는 우리 바다는 어찌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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