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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Dec 12. 2022

손 좀 잡아 주세요

아니, 오른손 말고 왼손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학교 입학시기가 빠르다. 우리나라에선 유치원에서 생활할 나이인 5세 - 6세가 그곳에선 1학년이다. 유치원은 이미 4세-5세에 졸업을 한다. 말이 1학년이지, 아직 많이 어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 꽤 있다.


알파벳 쓰기를 연습하던 한 남자아이가, 너무 힘들다며 손을 잡아 달라고 했다. 쓰는 것이 힘들어서 부탁을 하니, 당연히 오른손을 잡고 같이 글자를 써달라는 줄 알았다. 아이의 오른손을 함께 쥐자, 아이가 말했다.


"아니, 아니, 오른손 말고 왼손이요."

"어? 그래? 그래 그럼."


아이는 글씨를 다 쓸 때까지 왼손으로 내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글씨 쓰기를 마친 아이는, '땡큐' 인사와 함께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아이는, 힘의 균형이 필요했던 걸까.




버스 정류장에서 엄마와 아이가 앉아 있었다. 엄마는 봉지에서 붕어빵을 꺼내 아이에게 내주었다. 한 입 물은 아이는 뜨겁다고 했다. 엄마는 뭐가 뜨겁냐고 했다. 아이는 또다시 뜨겁다고 했다. 엄마는 안 뜨겁다고 했다. 그러자 아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나는 뜨겁다고!'


뜨거울 때 먹어야 더 맛있고, 배고플까 얼른 먹이고 싶은 엄마 마음도 충분히 알겠고, 뜨겁다는 제 마음이 그냥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니 답답한 아이 마음도 알겠다. 서로가 느끼는 온도가 다를 터인데 그것을 인정하는 게 때론 쉽지가 않다. 미안하다. 내가 네가 아니어서 말이지.


그래도 아이가 글씨를 쓸 땐, 내가 네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 아이들이 글씨를 쓴다는 건 어른들이 아무 노력 없이 해 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유치원에서 만난 여섯 살 아이는, 알파벳 쓰는 게 너무 어려워 영어가 싫다고까지 했다. 쓴다는 건, 글을 쓰든 글씨를 쓰든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아무 일도 안 하는 듯 보이는 왼손도 그렇게 힘이 들지 않았던가. 


단어 학습의 한 방법으로, 줄 노트에 한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효과성에 대한 논의는 뒤로 하더라도, 이렇게 반복해서 쓰는 것을 유독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러다 보면 쓰는 게 힘들어지고, 글자 역시 흐트러진다. 영어 숙제가 싫어지는 건 덤이다. 노트를 본 엄마의 눈에, 유독 성의 없어 보이는 글자들이 먼저 들어온다. 글씨를 좀 더 잘 쓰라는 의미였는데, '글씨가 엉망이다.'라는 표현이 앞서 나갔나 보다. 아이는 자기가 글씨를 못쓴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터키의 열 살 남자아이를 과외해 줄 때 일이다. 학습 능력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다소 부족해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말을 나누다 보니, 자신의 손글씨에 자신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손글씨 연습을 공들여 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이뻐지는 글씨를 보면서 자부심이 생기고, 자부심은 학업의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담임 선생님이 자신의 글씨를 보고 깜짝 놀라더라는 얘기를 해 주며 뿌듯해하던 소년은,  얼마 전 변호사가 될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아이들의 손글씨 쓰기 교육이 앞으로 필요할까에 대한 의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 숙제나 필기 모두 노트북이나 스마트 폰으로 할 수 있다 보니, 아이들이 손으로 글씨를 쓸 일도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많은 연구에서, 손글씨는 단순히 손으로 글자를 써내는 게 다가 아니라고 한다. 손으로 쓰는 글씨는 뇌의 발달과도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신경회로를 자극해 기억력과 창의력을 높인다고도 한다. 이런 신성한 기능의 손글씨인데, 아이들이 보다 즐겁게 쓸 수 있도록 해주자.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되는 날, 자꾸 거울을 보게 되듯이. 아이도 자신의 글씨가 예쁘다고 생각되면 '쓴다'는 행위가 긍정적이 된다.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글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한글이나 알파벳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한 줄, 한 단락 쓰기의 밑 작업이 되고 있음을 인정해 주자. 설령 키보드가 쓰기의 세상을 뒤덮을 그날이 오더라도, 그전까지는 손글씨의 노고를 인정해 주자. 아이들은, 오른손으로 쓰든 왼손으로 쓰든, 쓰고 있지 않은 손까지도 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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