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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Sep 02. 2023

차(tea)는 언제 예술이 되는가

거의 매일 아침, 블랙티에 설탕 없이 우유를 타서 마신다. 일 년에 적어도 삼백 잔은 마시는 셈이다. 이 정도 마셨으면, 차의 달인이라도 되었을 법 한데, 차 맛은 늘 다르다. 대개는 평범한 맛이고 어쩌다 한두 번 '맛있다' 생각되는 차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남편이 타 주는 밀크티는 대개 맛있고 어쩌다 한 두 번 정성을 덜 들인 평범한 차가 나온다. 


차이가 어디서 날까. 왜 그대의 차가 더 맛있는지 비법을 공개하라 해도 어깨만 으쓱할 뿐 별다를 거 없다며 말을 아낀다. 어느 날, 그가 차를 만들 때 작정을 하고 뒤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분명, 나와 다른 그만의 의식을 찾아내리라.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진정, 차 맛의 비결을 궁금해한다고 생각했는지 남편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다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과정 하나하나 설명을 덧붙였다. 


잔에 뜨거운 물을 받아 한 번 헹궈내며 잔의 온도를 먼저 높인다고 했다. 그리고 티백을 먼저 잔에 넣고 정수기 뜨거운 물을 받았다. 그렇게 해야 떨어지는 물로 티백을 깨울 수 있다고 했다. '깨운다고?' 차는 은은하게 우려내는 줄 알았는데, 잠든 티백을 깨우다니. 그러나, '깨운다'는 말을 곱씹으니, 하루를 밀크티와 시작하는 그에게 잘 어울렸다. 차를 깨우듯 자신도 잠에서 깨어났으리라. 그와의 차이는 끝단계에서 더 분명했다. 그동안 나는, 티백이 담긴 잔에 우유를 넣고 티백을 짜서 버렸다. 이에 반해, 남편은 오 분정도 우려낸 후 티백을 짜서 버렸다. 그런 다음 우유를 가장 마지막으로 넣었다. 


티백을 담은 주전자와 잔을 주면, 우려낸 차에 우유를 섞어 마실 수 있다. 그러나 바쁜 일터에서는, 티백이 든 머그에 우유를 넣은 뒤, 티백을 스푼으로 짜내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나의 차 만드는 습관은, 출근하기 전 혹은 일하다 티브레이크에 서둘러 만들면서 생긴 것이었다. 남편이 하는 식으로 티백을 우려 내고 우유를 섞으니 맛이 현저히 좋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만들어 준 차가 더 맛있다. 나 몰래 무엇이라도 더 넣는 것일까. 내 티백은 아직 잠이 덜 깬 탓일까. 


남편의 밀크티도 맛있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정말 맛있는 차가 또 한 잔 있다. 영국에서 일할 때 만난 파키스탄 친구 눌지하가 만들어 준 것이다. 평범한 브랜드의 차, 나 역시 사서 마시던 차였다. 그녀도 잔을 먼저 따뜻하게 했고 차를 만들어 내는 순서는 남편과 거의 흡사했다. 몇 가지 다른 요소를 찾아내자면, 그녀는 물을 팔팔 끓였다. 석회질이 많은 영국의 수돗물 맛은 한국의 정수기 물맛과 다르다. 분명, 차에 중요한 요소인 물맛이 보이지 않는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찬 우유가 아닌, 차 주전자에 살짝 데운 따뜻한 우유를 넣었다. 이로써 그녀의 밀크티는 예술이 되었다. 부드럽고 풍부한 향의 밀크티는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혀끝에서 감도는 듯하다. 


대개 모든 아침을 평범한 밀크티로 시작하지만, 눌지하가 만들어 준 것처럼, 끓인 물로 우려낸 홍차에, 데운 우유를 넣는 과정까지 추가해 정성을 기울이면 차 맛은 틀림없이 특별해진다. 


차 한 잔이 이럴진대 글은 어떨까.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라는 제목에 이끌려 집어 들었던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를 백 편을 쓰면 그중에 다섯 편쯤은 명시가 나오겠거니, 혹은 소설을 스무 편쯤 쓰면 그중에 두 편쯤 명작이 나오겠거니, 하고 편수를 늘려가는 것은 날아가는 새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백번쯤 하면 한 두 마리쯤 맞아서 떨어지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합니다.'라고 했던 김형수 작가님의 글을 읽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투고했던 원고가 모두 거절당하고 한풀이하듯 지난 12월부터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매일 발행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지금까지 써오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이 구절을 보고, 매일 쓰다 보면, 글도 조금씩은 나아지지 않을까 은근히 했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글쓰기 실력은 매일 글을 쓴다고 자동상승하는 것이 아니었다니. 매일 밤 습관처럼 쓰고 있는 이 행위가 의미 있는 일일까 생각해 보았다. 


매일 쓰기의 유의미함.


다섯 살 아들과 함께 잠들고픈 유혹을 물리치고, 자정 전에 매일 글을 올리던 행위가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아홉 달을 매일 쓰고 나서야, 부족함을 깨닫고 글공부할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단련되지 않은 돌팔매질로 새를 맞출 수 없는 일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나 보다. 쓰다 보면 저절로 늘겠거니 생각한 것은 서투른 이의 착각이었다. 깨닫는 데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제부터 갈고닦으려면 인내가 기본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을 보고 조급해할 이유가 없음도 깨달았다. 마음만 급해 무작정 달린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을. 


아직, 단 한 편도 누구에게 내세울 큼 대단한 은 다. 그도 내 안의 응어리를 로 어내나 아들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할 땐 그 자체로 내겐 행복한 쓰기다. 쓰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순간들을 일단 잡아 두었으니, 이것을 초고라 생각하고 다듬을 수 있다면, 오늘보다 내일이 기대되는 글쓰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차(tea)는 언제 예술이 되는가. 차를 만드는 행위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할까. 아닐 것이다. 눌지하의 밀크티도 기차시간에 쫓겨 달리는 상황이었다면 그녀가 만들어 낸 예술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따뜻한 잔을 감싸 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유롭게 마실 때 차는 비로소 예술이 되지 않을까. 


글을 쓰다 보면, 바깥세상의 시선이나 판단과 별개로 내 안의 중심추가 안정을 찾아가는 순간들이 있다. 흙탕물처럼 탁해진 마음, 분하고 억울해 출렁이던 마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로 쏟아내고 나니 어느덧 차분하게 잠잠해지던 순간들로 나는 조금씩 단단해질 것이다. 울림 있는 한 줄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내 자아는 조금씩 더 성숙해 갈 것이다. 


게 을 쓰다 보면, 글쓰기는 나만의 예술이 되어 주리라. 

그래서 오늘도 쓴다. 

매일매일 오늘만 쓴다. 

Everyday has a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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