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70년 전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시작된 갈등이 최근 더 심각해졌다.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무장단체 하마스 간의 전쟁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극으로 치닫는 갈등은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더욱 불안하다.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들. 머리에 붕대를 감싸고 울부짖는 아이들의 영상에 마음이 아프다. 육 개월 정도 생활하며 그 땅에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문화를 접해 보았다. 아수라장이 된 삶의 터전을 보며, 두고 온 친구 집을 보는 듯해 뉴스 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대학교 삼 학년 때 휴학을 하고, 키부츠(Kibbutz)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키부츠란 이스라엘의 집단 농업 공동체다. 외국인 자원봉사자의 경우, 노동의 대가로 숙식 제공과 포켓머니라 불리는 낮은 임금을 받는다. 당시, 호주 워킹 홀리데이와 함께 해외 경험 프로그램으로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내가 있던 곳은 레바논과 국경을 맞댄 북쪽의 부유한 키부츠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거창한 성지순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처럼 역사 깊은 도시는 방문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했다. 여행 계획은 심플했다. 버스로 예루살렘까지 쭈우욱 내려가서, 해변을 따라 히치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선, 여행 중, 모르는 사람의 차량을 얻어 타고 목적지나 도중까지 가는 히치가 생활화되어 있다. 도로를 지나다 보면, 현지인들도 엄지를 세워 들고 곧잘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택시기사마저도, "아 거기까지 가는 데, 뭘 택시를 타. 히치 해 히치"라고 할 정도였다. 이전에 일행과 함께 갈릴리 지역을 돌아본 경험이 있어, 이번엔 혼자 떠나보고 싶었다. 그렇게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가벼운 맘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예루살렘 한인 교회로 가는 한국 여학생을 만났다. 출발이 좋다. 그녀를 따라, 오랜만에 한식을 먹고 교회에서 만난 일행과 여러 순례지를 함께 다녔다. 특히, 히스기야 터널의 어둠을 지나온 것은 값진 경험이었다.
히스기야 터널은, 기원전 701년쯤, 앗시리아 왕 산헤립의 침공에 대비해 히스기야 왕이 만든 것이다.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기혼샘에서 출발해 예수님이 눈먼 바디메오를 치료한 실로암에 이른다. 직선거리는 320m이지만 S자형으로 굽어 있어 터널의 길이는 530m나 된다고 한다. 기혼샘과 실로암 양쪽 끝에서 공사를 시작해 중간에서 만났다고 하니, 삼천 년 전의 정교했던 측량기술이 놀라웠다. 1880년대에 발견된 실로암 비문에는, 터널이 뚫리기 직전 맞은편에서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고, 터널이 맞뚫리며 돌 깨는 사람들이 돌을 팠고 도끼와 도끼가 서로 부딪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터널 안으로 들어서면, 손바닥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말로만 들었던 '칠흑 같은 어둠'을 처음 만났다. 60센티미터 정도 폭의 벽을 의지해 발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조심조심 걸었다. 가도 가도 어둠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앞서 가는 일행을 놓치면, 혼자 터널 속에 갇혀 버리는 게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왔을까. 시간도 거리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때 뚜렷한 십자 모양의 빛이 보였다. 세상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삼천 년 전, 도끼가 서로 부딪히며 환호하던 소리가 내 속에서 들리는 듯했다. 어둠 속의 불안이 안도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도, 한 걸음만 더 가면 출구가 있을 거란 믿음은 그때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루살렘 여행은 내 정보력이나 실행력으로는 그녀와 함께한 일정의 반도 찾아 먹지 못하고 왔을 풍성한 성찬이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는 혼자 떠났다. 나의 허술함을 간파한 그녀. 작별 인사에 걱정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정거장을 잘 못 내려 길 한복판에서 두리번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황망해하고 있는 나를 보고 호텔 직원이 다가왔다. 곧 있으면 이곳으로 자기가 아는 베들레헴 대학교 학생이 올 테니, 함께 가라고 알려줬다. 반신반의하면서 그가 있는 호텔 앞에서 기다렸다.
정말 청년이 등장했다. 베들레헴이 정확히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는데, 이 남자를 따라간다고? 이 사람이 학생인 건 또 뭘로 믿지.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단정한 차림에 선한 인상의 그와 얘기를 나누며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고, 지나가는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는 청년이 베들레헴 대학교 학생인 것은 학생증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베들레헴 순례지를 돌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못에 박힌 예수님이 누워 계셨다는 돌에 손을 얹어 보기도 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져서도 그를 맞이한 건 차갑고 딱딱한 돌이었다니. 괜히 미안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대단한 역사를 간직하였지만, 평범해 보이는 돌덩이를 보며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순례지를 마치고 베들레헴 대학교 정원을 둘러보았다. 한낮의 열기를 아이스크림으로 식히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의 고향으로 기억되지만, 내겐 처음 만난 대학생이 베푼 친절한 도시로 더 오래 남는다.
베들레헴을 떠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걸어 피곤했다. 여행을 하다가 지친 모습이, 깡마른 팔레스타인 팔라페 상인의 눈에도 불쌍히 보였나 보다. 그는 나를 손짓으로 불러 옆에 있는 의자를 내주고 웃으며 물을 권했다.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그게 나란 듯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힘들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팔라페 하나를 주문했다. 정말 힘들고 배고팠는데도, 팔라페는 정말 맛이 없었다. 그의 마음만 받기로 하고 반 이상은 그냥 들고 일어섰다. 홀로 여행하면서 사람이 많이 그리웠다. 비록, 신체의 허기는 달래지 못했으나, 그는 내 마음의 허기를 채워 주었다. 그래서 그의 맛없는 팔라페는 용서되었다.
텔아비브 해변도로부터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에선 대중화된 히치로 갈 계획이어서 차편은 알아보지도 않았다. 어딘지 모르지만, 굉장히 복잡한 곳이었다. 히치를 할 때는 목적지 방향으로, 상대 운전자가 갈 수 있는 만큼 타고 가다 내려서 다시 히치를 했다. 나보다 지리를 더 잘 아는 현지인들은, 가는 길에 내가 다음 히치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지점에 내려주곤 했다. 자기 목적지보다 조금 더 가서 내려주고 유턴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그렇게 이름 모를 이들의 친절을 징검다리 삼아, 키부츠에 점점 가까워졌다. 심플한 여행 계획이 차질 없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러던 중, 딱 봐도 깐깐하게 생긴 운전자와 맞닥뜨렸다. 그는, 이스라엘을 히치로 여행하던 중 처음 듣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돈을 내고 버스를 타지 않는 거지?"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이방인이 자신의 나라에서 공짜로 차를 얻어 타고 다니는 것이 불쾌한 직설적 표현이었다. 맞긴 맞는 말이지만, 이 방법도 여기 와서 배운 것이니 억울한 감정도 일어났다. 그는 정류소까지 '태워줄 테니' 거기서 버스를 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왠지, 이 성난 남자에게 국적을 밝혔다간, 내 나라가 불필요한 욕을 먹을 것 같았다. 당시, 어디 나가서 실수하면 일본인이라고 하라는 농담이 유행했다. 까맣게 그을린 나를 보고 동남아시아에서 온 줄 아는 이들이 꽤 많았지만, 믿거나 말거나 그냥 Japan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쓰미마센이라고 쿨하게 쐐기를 박았다.
농담에서나 씀직한 말을 실제 상황에서 써먹었는데도,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어디서 온 것은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라고 할 걸 괜히 다른 나라를 들먹인 것이 더 자존심 상했다. 모두가 히치로 여행하는 이들을 환영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또한 달가운 일은 아니다 보니 히치 할 의욕을 잃고 한참을 걸었다.
걷다 보니 기분이 풀렸다. 계획했던 대로 다시 히치를 시작했다. 멋진 사륜구동에 활짝 웃고 있는 사내가 타고 있었다. 웃음으로 화답하며 기분 좋게 차에 올랐다. 그는 연신 웃으며 자신만이 알고 있는 멋진 해변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해변의 모래를 흩뿌리며 한적한 해변 끝에 주차시켰다. 자신이 좋아하는 해변이라며. 그리고 내게 말했다. 내가 샤론스톤보다 이쁘다고.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멋지다던 해변은 사하라 사막보다 더 황량하고 막막해 보이기만 했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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