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면 용감하다
이스라엘에서 6개월의 비자 기간이 끝났다. 한국으로 바로 귀국하는 대신, 영국에 잠시 머물다 가기로 했다. 자원 봉사자들 사이 오고 간 고급정보에 의하면, 영국에선 여행자들이 비자 없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했다. 워낙 물가나 임금이 비싸다 보니 서로의 필요에 의해, 암암리에 묵인해 준다고 했다. 계획에 없던 유럽 방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반팔 티셔츠 달랑 한 벌 입고 이스라엘 공항을 출발했는데, 도착한 런던은 9 월 중순치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공항을 나서기 전, 가방에서 긴 팔을 찾아 두어 겹 껴입었다. 수북이 모아 놓은 낙엽 위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둑한 하늘과, 물에 젖어 선명한 낙엽, 영국에서 시작한 첫날의 기억은 색 바랜 세피아톤의 사진 같다.
일을 찾아야 런던에서 체류할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누군가, 상점마다 들어가 vacancy가 있냐고 물으면 될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상점 즐비한 거리로 나섰다. 서툰 영어지만, 선명하게 던지는 vacancy 의미를 알아차렸다는 듯, 혹은 이미 내가 누구인지 알기라도 한 듯, 점주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창문에 VACANCY라고 대문자로 크게 써 붙인 곳을 발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금발의 여자가 데스크 뒤에서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배운 사람답게 vacancy 있냐고 물었다. 여자는 있다고 했다. 어떤 일이냐고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못 알아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유럽 악센트로 미루어 내 악센트가 어려웠나 싶어, 사인 보고 들어왔다고 창문을 가리켰다. 여자는 다시 웃으며 얼마나 묵을 예정이냐고 했다. 오 마이 갓. Vacancy가 다 똑같은 vacancy가 아니었다. 호텔에 빈 방 있다는 사인을 보고 무식하게 들어가서 ‘일자리 어디 있소. 내가 하겠소’ 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사람이었다. 아는 동생 Y가 이 얘기를 듣고는 “언닌 참 그러고도 잘 산다.”라고 했다. 그렇지? 그러고도 참 잘 살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현장에서 구직을 열심히 했더니, 지나가던 분이 Regent Street 000 가죽 재킷 샵에서 직원 구한다는 얘기 들었다며 이력서 갖고 가보라고 했다. 민박집 느린 컴퓨터로 이력서를 써보려 했으나, 무언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 것을 보고 일단 재킷 샵으로 달려갔다.
일자리가 있다는 걸 알고 달려온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었나 보다. 매니저는, 여자애가 밝게 웃으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눈길이 갔다고 했다. 검은 머리, 강한 눈빛의 매니저는 판매 경험이 있냐고 물었다. 그렇다 하니, 이력서가 필요하다면서 A4 한 장을 건넸다. 지금은 어떤 경력을 썼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 이력서를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 하고, 마지막에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지로 동그란 스마일 이모티콘도 그려 넣었다. 다만, 판매 SALE 이란 단어를 SAIL로 썼다는 것은,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알았다. 매니저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어디 배 타러 가는 애가 잘 못 온 줄 알았다고. 그의 농담에 깔깔거리는 나를 보며 그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매니저는 카슈미르 출신으로 영업 기술이 신의 경지였다. 그는 손님이 가게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상대를 파악하는 듯했다. 모두를 상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나서면 돌아서려던 사람도 어느새인가 카드를 꺼내고 있었다. 맘에 쏙 드는 물건을 찾게 해 주어서 오히려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사이즈가 안 맞아 돌아서려는 사람에게도 같은 사이즈 같은 재킷을 팔았는데, 손님은 다른 재킷으로 알고 만족해할 정도였다. 돈을 무척 좋아하는 영국인 할아버지 사장이 총애할 만하다.
이력서를 즉석에서 썼다고는 해도, vacancy나 sail 사건에서 보듯, 난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했다. 영어보단 수학이 편했다. 그렇다고 수학을 썩 잘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영어는 체질이 아니라고 고등학교 내내 생각했었다. 독일어는 더 심해서, 외국어라면 진저리를 쳤었다.
한국인의 악센트가 알짜배기로 들어있는 서툰 영어를, 아니 나를, 백발의 사장님은 아주 못 마땅해했다. 그의 표정과 눈빛이 알려주었다. 샵 입구에 서 있던 나를 지나치며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려 마주한 얼굴에선 ‘나 너 싫어’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계산대 옆에 기대 서서 나를 노골적으로 노려볼 땐, 평소보다 위축되어 실수가 더 잦았다. 눈치 빠른 매니저는, 오늘 J가 여러 벌 팔았다며 묻지도 않은 질문에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장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매니저가 주말 근무를 평일까지 늘려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사장님의 눈초리 때문이기도 했다.
퇴근이 두어 시간 남았던 어느 날, 매니저는 갑자기 내게 지하 창고로 내려가 짐을 정리하라고 했다. 워낙 많은 물건들이 뒤죽박죽 엉켜 있어 하루 종일 정리해도 손을 댄 티가 나지 않을 그곳으로 가라니, 생뚱맞게 무슨 일인가 했다. 내려가면서 흘끗 올려다본 가게 입구로 사장 할아버지가 들어서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보다 먼저, 매의 눈으로 사장의 방문을 포착한 매니저는, 그렇게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그는 사장이 가고 나서야 정리 다 했으면 올라오라고 했다. 마치, 이제 안전하다는 암호처럼 들렸다.
매니저는 일찍부터 집을 떠나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지나가던 노인이 그의 발바닥을 보더니 “많이 돌아다닐 운명”이라고 한 것이 딱 들어맞을 만큼 많은 곳을 지나왔다고. 외국에 와서 일을 구해보려는 이들에게 너그러울 수 있었던 건, 그도 수없이 겪었을 타향살이의 서러운 기억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 큰 소리 내는 일 없이 여러 나라에서 온 직원들을 아울렀다. 실수해서 당황하는 직원에겐 여유롭게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주고, 할 말은 짧고 간단히 전달했다. 그와 함께 일하는 동안, 내내 든든했다.
몇 년 후 Regent Street를 방문했을 때 가죽 재킷 샵은 사업을 접었는지 장소를 옮겼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매니저를 다시 볼 수 없어 아쉬운 맘에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고 서성거렸었다. 여행비자였음에도 세금까지 낸 명세서를 받으며 주중엔 동네에서,
주말엔 런던 시내 한 복판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귀국했던 그때. 매니저는 나의 한 계절을 무사히 넘겨준 또 한 명의 고마운 수호천사였다.
Photo: visitlondon.com, Regent Str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