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유아교육을 공부하고 처음으로 유치원 면접을 갔을 때다. 원장님은, 방금까지도 아이들과 뛰어놀다 온 듯 가쁜 숨을 내쉬며 경쾌하게 나를 맞았다. 길에서 마주쳤다면, 줄무늬 티셔츠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멋쟁이 할머니라고 생각했을 거다.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 면접을 여러 번 봐서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정식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인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 보니 몸에 힘이 들어가고 많이 떨렸다. 하얀 벽면의 밝은 사무실 한가운데 앉아 기다리는데, 입술은 바싹 마르고 몸은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차를 마시겠냐고 해서 괜찮다고 했는데, 가늘어진 목소리에 긴장이 그대로 담겨 나왔다.
원장님은 이력서 파일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에 대해 간단히 말해 달라고 했다. 그 당시 나의 수호신이 잠시 외출 중이었다고 확신한다. 너무 떨린 나머지 나를 영어로 설명할 자신감을 잃고, 나름 대처해 본다고 했던 말.
"이력서 안 보셨나요? 거기 다 써놨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다. 엉망진창 면접 경연대회가 있다면, 강력한 우승 후보에 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 원장님의 밝은 얼굴이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뀐 것을 잊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의 대책 없는 대답에 침착하게 대처했다. 물론 이력서를 다 보았다고, 그래도 나를 통해 좀 더 듣고 싶다고 친절히 응해 주었다.
그때의 면접 기억은 딱 여기 까지다. 그 이후는 아마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지 소환이 불가능하다. 모처럼 필드에 나갔다가 공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퇴장한 선수처럼, 허탈하고 아쉬운 마음이었으리라.
아르바이트 때는 오히려 당당했다. 동네 주유소에 이력서를 넣고 매니저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나처럼 성실한 사람 안 쓰면, 손해는 당신이 보는 건데 뭐.’라는 생각으로 응하곤 했다. 면접 말미에 의례적으로, 혹시 질문할 것이 있냐고 하면, "그럼 일은 언제 시작할까요?"라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 주유소 사장이지만, 체인 주유소라 매니저의 직함을 갖고 있던 카이는 이런 당돌한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20년 전 영국의 주유 시스템은, 셀프주유한 손님들이 주유소에 딸린 편의점으로 들어와 계산을 하는 방식이었다. 미리 주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악용하여 계산하지 않고 바로 도주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주유하고, 편의점으로 들어와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 혹은 당분 섭취를 위해 한 두 종류의 초콜릿바를 집어 들고 모든 비용을 정직하게 잘 치렀다. 간단한 응대와 스크린에 찍힌 금액 계산만 잘하면 그리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래도 아직 일이 서툴던 초기에 가장 힘든 부분은, 여섯 개의 펌프에 주유가 동시에 시작되고 비슷한 시각에 사람들이 몰릴 때였다. 차들이 계속 밀려들어 주유를 하면, 혼자, 펌프 승인을 하고 차량도 지켜봐야 하고, 안에서 손님 응대도 해야 했다. 당시에는 현금결제가 훨씬 많아서 거스름 돈 내어주기 바빴다. 일도 손에 익지 않았는데 바쁘기까지 하면 실수가 많다. 게다가 이런 틈을 타서 소액의 주유 차량이 도주까지 해버리면 정신이 쏙 빠져버린다.
주유비용을 내지 않고 도주해도 샵 안에서 파트타임 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신고를 해도, 형식적인 절차만 갖출 뿐, 신고 이후 보상에 대한 소식은 듣지 못했다. 기름 도둑은 주유소 사장들의 골치였다. 일부 사장은 낌새가 수상한 운전자 차량 번호를 미리 적어두거나, 주유를 너무 많이 한다 싶으면 주유 승인을 멈추는 등, 자체 매뉴얼 지침으로 자기 재산을 스스로 보호하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수상한 운전자'의 기준으로 펌프를 정지했다가, 인종차별 주유소라며 강력하게 반발하던 손님덕에 카이는 본사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언론에도 알리겠다고 해서, 그가 잠시 샵을 옮겨 가 있기도 했다. 하필 내가 일할 때 벌어진 일이라 마음이 쓰였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내 탓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에 오히려 괜찮다고 했다. 자신이 정한 매뉴얼이었고 나는 그것을 따랐을 뿐이라고.
심지 굳은 그는 얼마 후 다시 샵으로 돌아왔다. 보란 듯이 열심히 하더니 주유소를 네 곳이나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현금 다루는 직원들이 간혹 불미스러운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그에 반해 정산할 때마다 우리나라로 치면 십원정도의 오차로 마무리하는 나에 대한 신뢰가 높았다. 그래서 다른 지점에 인원충원이 필요할 땐, 차로 ‘모셔다’ 주고 피자를 사 주기도 했다. 직원들에게 사탕 한 알 먹어보라 준 적 없던 그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일을 그만두고서도 우린 가끔 저녁을 먹었고, 여행 프로젝트로 급히 돈이 필요할 땐 선뜻 빌려주던 그였다.
카이는 자기가 원하던 지역에 집과 주유소를 함께 마련했다. 자기도 나와 똑같이 주유소 파트타임 캐셔에서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며, 나에게도 매니저 트레이닝을 받아 보라고 했다. 당시 나의 꿈은 아쉽게도 주유소 사업이 아니었기에 정중히 사양했다. 그래도 학교 다니는 내내, 그의 배려와 인정으로 평탄한 파트타임 수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다만, 언제까지 파트타임으로만 생활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첫 면접에선 어이없는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이제 시작이라 마음먹으니 나의 엉뚱했던 대답에 오히려 웃음이 났다. 다양한 인종, 여러 직업군의 사람을 대해야 하는 주유소는 일하기 마냥 편하고 쉬운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크고 작은 실수에 잔소리나 탓하는 법 없이 나를 믿어준 카이, 그의 신뢰는 나 스스로를 믿게 하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 어떤 면접에서도, 이력서 안 보셨냐고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보셔서 아시겠지만, 전 이런 사람입니다.’ 며 당당할 수 있도록, 카이는 또 하나의 징검다리를 수면 위로 올려 준 사람이다.
“이력서 안 보셨어요?”라고 대답했다면, 카이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궁금하다. 잠시 당황은 하겠지만, “재미있는 친구네, 내일부터 일 시작하지.”라고 해 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카이였어도, 그렇게는 어려울 듯. 사근사근한 말투에 잘 웃던 그가 문득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