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북쪽에서 살던 때였다. 새로 옮긴 방에 문제가 많아 서둘러 다른 방을 알아봐야 했다. 다행히 마음에 드는 곳이 있어 바로 계약했다. 주인은 작달막한 흑인 남성으로 흰 치아가 드러나게 자주 웃었다. 이사 날짜가 되어 그 집 마당에 짐을 부려 놓았는데, 문은 잠겨 있고 주인은 연락도 되지 않았다.
"Where are you now? Are you coming?"
두 시간 넘게 기다리며 벌써 세 번째 남긴 메시지였다. 어딘지 모를 불안함에 전화를 재차 걸었다. 어렵사리 통화가 된 주인은, 오는 중이라고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해가 져서 어둑해져도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주황색 자동차 한 대가 집 앞에 서서 수상쩍게 잠시 머물다 사라진 이후에야 나는 기다림을 포기했다.
영국에 산 지 수년이 지난 터라, 짐이 많이 늘어 있었다. 슈트 케이스 몇 개로 이동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Van을 불러 짐까지 함께 날라주는 서비스를 이용해야 했다. 그때 짐은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한데, 그냥 그 집 마당에 다 버리고 단출하게 새로 시작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삶이란 게 또 어디 그런가. 하루 이틀 짧은 여행길에도 필요한 자잘한 것들로 시작해, 막상 또 사려면 다 돈이었을 테니. 얼마 남지 않은 파스타 봉지도 돌돌 말아 상자 어딘가에 밀어 넣고 포장했을 미련 많은 이삿짐이었다.
막막했다. 날은 어두워지고 갈 곳은 없고. 이 짐을 들고 갈 수도, 놔두고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생각난 사람이 아니따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이스라엘에서 런던으로 왔을 때다. 열차에서 만난 어떤 할아버지가, 여행 가려고 왔는데 여권에 문제가 있어 돌아간다며, 런던에 머물면 자기한테 놀러 오라고 했다. 며칠 민박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적어 준 종이 한 장 달랑 들고, 배고픈 여행객에게 샌드위치를 나눠주어 고마웠다고 인사도 할 겸 찾았다. 마침, 할아버지는 방을 임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놀러 오라고 했던 걸까 하면서도, 마지막 하나 남아 있는 방으로 짐을 옮겼다. 아니따는 할아버지 집에서 멀지 않은 시장 잡화점에서 캐셔로 일을 했다. 내가 그 옆 아기 옷가게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그녀와 가까워졌다.
영국에 와서, 지방에서만 생활을 이어왔던 내게, 런던에서 비빌 언덕은, 자신의 집이 있는 아니따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전화를 해서 도와 달라고 하기엔 단번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절박한 마음에,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폰에서 그녀 번호를 찾아 눌렀다. 다행히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사기꾼 집마당에 부려놓은 짐을 바라보면, 당분간만 머물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다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Come!"
인도에서 태어나 선생님을 했던 그녀는, 짧지만 단호하게, 주저 없이 말했다.
“Of course Ji. Come come.”
마당에서 하루종일 바깥공기를 들이마셨던 이삿짐들은 거실 한가득 천정까지 쌓아 올려졌다. 어그러진 일이야 어찌 되었든, 나의 짐들과 함께 잠을 잘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잠시 안도했다.
전날의 피곤함으로,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잠을 자던 나는 아니따가 차려 놓고 간 밥을 데워 먹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 갈 곳을 잃고 쌓아 올려진 박스 무더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짓는데, 거실 중문이 열리며 그녀의 세 살배기 아들 프라제쉬가 베이비 시터와 들어섰다. 가무 잡잡한 피부에 엄마를 닮아 곱슬기 있는 머리. 그리고 왕방울만 한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Hello!!!
나는 잠시, 내 현실을 잊고 처음 보는 아이에게 완벽한 하이톤의 세상 즐거운 인사를 건넸다. 프라제쉬는 크게 낯가리지 않고 내게로 다가왔다. 어린아이를 만날 일이 거의 없던 대학교 시절, 지인이 갓 태어난 조카를 보며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작은 아이를 보면서 이상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그땐 그 말이 와닿지 않았다. 단순히 이쁘다는 얘기의 다른 말이려니 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프라제쉬를 안아 올렸다. 아이를 품으니, 복잡했던 심정이 가라앉는 듯했다. 간 밤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니, 몸도 가뿐해진 느낌이었다. 너와 내가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도 너는 내게 다시 살아내라고 하는구나. 이것이 순수한 어린 생명의 힘인가 보다 했다.
그때그때 필요한 짐만 풀어내도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자 높이 쌓여있던 짐은, 조금씩 낮아졌다. 정 많은 아니따와 케냐출신의 남편과도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는 것에 점점 익숙해졌다. 인도 집에서 가져온, 버펄로 우유로 만든 치즈도 기꺼이 나눠주며 친동생 챙기듯 아껴주었다. 바지런한 그녀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듯 신선한 재료로 저녁을 만들었다. 그녀가 바로 반죽해 구워주는 자파티빵은 어느 인도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보다 담백하고 맛있었다.
프라제쉬가 나를 잘 따르고 함께 노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얹혀 지내는 입장에서 아니따 부부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가게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걷는 게 피곤해지면, 내 앞을 가로서서 저를 안으라고 ‘끙끙’ 거렸다. 이 조그만 녀석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묵직한 녀석을 들어 올려 ‘끙끙’ 거리고 돌아오면, 우린 둘 다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사가지고 온 사탕을 까먹었다. 녀석과 함께 있으면 어두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우울할 틈은 프라제쉬가 모조리 챙겨 간 듯했다. 끊임없이 사브작 거리는 녀석을 보는 일만으로도 하루해가 금방 갔다. 프라제쉬가 내 검지 손가락을 감싸 쥐면 녀석의 온기가 내 안 가득 충전되는 듯했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저 짐이 다 풀어지기 전에 일도 구하고 방도 구하리라 했다. 황소자리라 일복이 많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인지 얼마 후 집 근처 이십여 분 떨어진 학교에 보조교사로 채용이 되었다. 런던으로 내려와서 동네 유치원도 아닌 제법 큰 학교에 지원한 터라, 발표날까지 아니따와 학교 이름을 주문 외우듯 중얼거리며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외출했다 돌아와 현관문을 열기 직전 울려온 전화. 인터뷰를 했던 교감 선생님의 반가운 소식에, 뛰는 가슴 안고 집으로 들어가 아니따와 부둥켜안고 환호했었다. 엄마와 이모가 좋아하니, 프라제쉬도 따라 웃었다. 통통한 볼을 가진 아이의 '참을 수 없이' 귀여운 미소는, 내일도 열심히 달려보라는 천사의 응원 같았다.
Zone 4, 런던 북부의 3-4 세를 위한 유치원과 5-7 세까지의 아이들이 한 학급에 서른 명씩 무려 열다섯 반이나 있던 학교. 호구조사 결과, 출신배경 다른 아이들의 집에서 쓰는 언어가 34 개에 달할 정도로 다양성이 차고 넘치던 학교. 교감 선생님도, 여기서 살아남으면 어디 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던 역동적인 아이들의 학교. 그곳에서 신나게 삼 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건 모두 아니따가 마련해 준 터전 덕분이었다. 그리고 온몸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나의 아기 천사 프라제쉬 덕분이기도 했다.
힌두교인 아니따의 신에게도, 세상의 모든 신은 이 땅의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나의 신에게도 감사했다. 그들이 한 편이 되어 만남을 이어준 프라제쉬, 작은 천사는 런던의 이방인인 나를 살리고, 또 한 걸음 내딛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