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챙겨 오시오.
칼리지 랭귀지 코스를 다니면서 파트타임으로 스포츠센터 리셉션에서 일했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종합 스포츠센터라 탁구, 배드민턴, 스쿼시는 물론 수영과 아이들의 수영 생일파티까지도 열 수 있는 규모였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데다, 아직 영어도 서툴렀기에, 맘 속으론, 손님들과 간단한 회화 정도로 모든 대화가 끝나기를 바랐다. 가령,
“A swim ticket please.
Here you are.
Thank you.
Enjoy.” 정도. 그날도 소박한 소망을 갖고 리셉션 룸을 서성 거리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스쿼시룸 예약 손님이었다. 스쿼시룸은 선착순이었다. 예약으로도 가능해서, 먼저 예약을 하면, 무작정 방문한 사람은 기다리거나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지금 가면 스쿼시 칠 수 있나? 있다.
오케이. 예약해 달라.
오케이. 예약 완료했다. 오케이 곧 간다.
오케이 곧 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이 넘치는지, 스포츠 센터 문을 거의 박차듯 들어오는 여성과 남성이 있었다. 그녀는 스쿼시룸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있음을 알고 왔다는 태도였다. 그 당연함은, 조금 전 예약자여서일까 하는 추론으로 이어졌고, 예약자 이름을 확인하지 않고, ‘전화한 사람? 빨리 왔네' 하며 스쿼시 방을 내주었다.
리셉션의 어설픈 관문을 통과한 그들은, 스쿼시 룸으로 들어가기 전 그날의 센터 매니저에게 예약자 이름과 다름이 발견되어 제지를 당했다. 넘치는 에너지의 여성은 나를 향해 노발대발했다. 있다고 해서 들여보내놓고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며, 직원이 실수한 거니 자기네는 공을 치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매니저는 곧 예약자가 올 거라 불가능하다고 했다.
스포츠 센터 구조는, 입구에서 들어오면 리셉션이 있고 티켓 업무는 창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난 그녀는 리셉션 방문도 박차고 들어 올 기세였다. '나' 에게 직접적으로 저토록 화를 내는 백인 여성을 처음 대하다 보니 너무 떨렸다. 너무도 분명한 내 실수였기에 더더욱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매니저 오웬은, 내게 다른 고객 응대를 지시하고 복도 쪽에 선 그녀와 내가 있는 리셉션 입구 사이에 딱 버티고 섰다. 고객들에게 티켓을 끊어주면서도 신경은 온통 문 쪽으로 향해 있어, 나의 영어는 더욱 버벅거렸다. 문 밖에선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낮고 조용한 매니저의 응대가 오고 갔는데 마치 그녀의 '화'를 받아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큰 키에, 운동으로 단련된 다부진 몸매의 매니저가 그때처럼 든든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얼핏 돌아보았을 때, 팔짱을 끼고 힘이 들어간 다리는, 평소 고객을 향한 친절한 바디랭귀지의 그가 아니었다.
잠시 후 상황은 종료되었고, 그들은 돌아갔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센터는 다시 조용해졌다. 매니저는 리셉션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자신의 업무만 보았다. 그가 방금 전 상황에 아무 말이 없길래, 실수해서 미안하다고 내가 먼저 말했다. 그는 별 일 아니란 듯이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She doesn't deserve the room."
공을 칠 자격이라...
그녀가 정중하게 항의했더라면, 매니저인 그가 무료 티켓 한 장 끊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기분 상한 거, 다음에 와서 공짜로 치면서 풀어보라고. 나와 매니저의 극진한 사과도 덤으로 받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순간의 분을 이기지 못해, 기분 좋게 공을 칠 기회도 잃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언제든 공은 다시 칠 수 있지만, 그녀가 바닥에 떨어뜨린 인격은 돌아오지 않는 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면, 나 역시도 그동안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기회 속엔 미리 갖추지 못했던 자격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것이야 할 것이 다른 이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아직 나의 그릇이 충분하지 못함을. 밖에서는 보이고 내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그 무엇을, 겸손한 마음으로 갈고닦을 자세가 내겐 있었을까.
스포츠 센터에는 센터 장 아래 매니저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운동의 기본기와 스포츠 정신을 함께 갖추어서일까, 하나같이 여유롭고 매너가 좋았다. 리셉션에서, 수영장에 있는 매니저에게 무전기로 메시지를 전달할 땐, 여러 소음이 뒤섞여 내용이 선명하게 전해지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상대의 악센트가 낯선 이에겐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으리라. 그러나 어느 누구도, ‘네 말 알아듣기 힘들다.’라고 하는 일 없이, 수영장에서 리셉션으로 올라와 다시 한번 말해 주겠느냐고 물었다. 다름에 대한 그들의 배려와 포용은, 이십여 년 인생에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날 오웬이 내 실수를 호되게 지적하고 그녀에게 고개 숙였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을 감동이자 가르침으로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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