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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Oct 21. 2023

히치하이킹의 징검다리(2)

(히치하이킹의 징검다리 1부에 이어서)


'정신을 차리자!’
 해변에서 달려봤자 사륜구동을 따돌릴 재간은 없기에, 침착하게 구슬려 보기로 했다. 이봐요. 여행자를 태워주는 당신은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지금 해가 지고 있으니, 어서 도로로 진입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내는 괜찮다며 웃었다. 여긴 석양이 멋지다고. 내 손 위로 그의 손이 올라왔다. 나는 손을 빼며 웃었다. 나는 결코 샤론스톤처럼 이쁘지 않아요. 정말입니다. 그는, 샤론스톤보다 이쁘진 않지만, 너만의 아름다움이 있다며 윙크를 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때 그의 전화가 울렸다. 밖으로까지 간간이 들려오는 큰 소리에 그의 표정은 시무룩해지고 목소리는 온순해졌다.


"내 차 어딨어? 차 가지고 당장 돌아와!"


정도의 대화였을까. 그는, 친구에게 돌아가 봐야 한다고 했다.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그 차에 다시 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름 모를 해변에서 밤을 새워야 할 수도 있는 터라, 결국 그의 차로 도로까지 나갔다. 그는 더 이상 추근거리지 않고 순순히 차를 세웠다. 내리면서 고마웠다고 진심으로 인사했다. 그러나 내려서도 한참이나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서 있어야 했다. 오후에 만났던 깐깐한 운저자는, 이런 일을 피할 수도 있게 해 주려고 신이 보낸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어딘지도 모르는, 땅거미 어둑한 도로. 이제 버스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버스 정류장은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길게 뻗은 도로. 별수 없이 다시 엄지를 세워 들 수밖에 없었다.


허름한 차가 속도를 줄였다. 운전석엔 호박씨를 까먹고 차 아무 데나 던지는 터프한 거구의 노인장이 보였다. 그냥 보낼까 망설였다. 그러나 보조석으로 튄 호박씨를 손으로 털어주고는 무표정하게 기다리는 할아버지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정류장까지만 갈 셈으로 조심스레 차에 올랐다.


그는 이 시간에 어디서 오늘 길이냐고 물었다. 키부츠 벌룬티어인데 여행하다 길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이 시간에 내가 있는 키부츠까진 무리라고 했다. 난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달라고 했다. 그는 키부츠에서 임금도 받는지 궁금해했다. 적은 액수를 듣더니 내 나라에 와서 일을 하는 데 그것밖에 못 받느냐며 외려 미안해했다. 마치, 고생하는 손녀를 안쓰러워하는 할아버지처럼. 숙식이 제공되고, 딱히 큰돈 쓸 일이 없어서 괜찮다고 했다. 그는,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근처 방에서 쉬고 있으면, 내일 와서 키부츠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방값을 계산 한 뒤 떠났다. 우리의 도착부터 그의 출발을 지켜본 주인아주머니는 말했다.


"남자가 원하는 건 딱 하나야. 내가 너라면 그가 돌아오기 전에 지금 당장 떠날 거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긴 하루를 보낸 피곤함에 문 꼭 잠그고 잘 수 있는 방이 있다면 달려가 당장 눕고 싶었다. 물에 빠진 사람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과묵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그가 내뱉던 한 마디. “난 바록이야.” 마치, 자기 이름을 걸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사륜구동 운전자와는 어딘지 다른 느낌. 일단은 직감에 의존하기로 했다.


그는 약속대로 다음날 아침에 데리러 왔다. 그는, 지중해 바다가 보이는 도시 하이파를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의 샌프란시스코라 불리는 곳. 높은 언덕에서 푸른 바다를 한없이 바라봤다. 그날 아침 바라본 파란 하늘에 설렜던 마음은 지금도 생생하다. 점심에는 그의 친구 집을 방문하여 차와 케이크를 함께 했다. 그 집의 아이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녀석의 커다라 눈이 떠오른다. 그는 건축일을 했다. 가는 길에, 공사 현장에 들러 인부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하고, 내가 머무는 키부츠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그런 그가 어느 날은, 프랑스 룸메이트 마틸다의 지인이 머무는 성당으로 출발하려던 오후,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두 말 않고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벼운 인사만을 남기고 차를 돌려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절묘한 타이밍을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집트를 여행 갈 때도, 나와 일행을 함께 태워다 주며, 이집트는 이곳보다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는 말이 든든하게 들렸다. 이스라엘서의 마지막 날, 바록 할아버지는 여전히 호박씨 가득한 차로 공항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의 차 거울에 달아주고 온 꽃술 달린 노리개는 여전히 달려 있을까.


나는 수호신의 존재를 믿는다. 살다 보면, 탄탄한 징검다리 돌도 건너지만 잘 못 디뎌 위태위태 흔들리는 돌 위에서 당황하기도 한다. 중심을 잃고 물에 빠지기 직전, 다음 징검다리로 얼른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것은, 때론 내 영역 밖이란 생각이 들었다. 홀로 떠난 이스라엘 여행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 그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 마치,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수레바퀴를, 필요하면 굴리고 위험하면 멈추어 준 누군가와 함께한 느낌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여행자를 위해, 히치의 징검다리를 놓아준 이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정보를 공유하며 좋은 것을 함께 나눈 이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 예루살렘으로 가는 한인 여학생, 베들레헴 대학생을 소개해 준 호텔 직원 그리고 대학생. 특히, 잊을 수 없는 바록 할아버지가 바로 그랬다. 혼자 여행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그 길에서 만난 따뜻한 이들이 참 많다.


팔레스타인 팔라페 아저씨의 가족과 이웃도, 바록 할아버지의 손주들도 모두 안전하고 행복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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