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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씩스미미 Feb 27. 2024

DNA는 못 속이지

어쩌다 브런치

 어느 날, 집에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나 : “엄마! 밥솥 주문하셨어요?”

 엄마 : “왠 밥솥? 다른 집에 온 거 아니야?” 

 나 : “받는 사람 이름이 아빤데?”


 언젠가부터 우리 집에 출처 모를 택배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수신인과 주소는 분명 우리 집이 맞는데 정작 받는 사람은 택배가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알지를 못한다. 보낸 곳을 보니 KBS, SBS,... 죄다 방송국이다. 방송국과는 학연 혈연은 커녕 몇다리 건넌 지인조차도 없는 곳인데 뭔 택배를 이리 많이 보내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보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니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라디오국에서 보낸 택배였던 것이다. 라디오국에서 택배를 왜?


 주말 어느 날, 아빠가 테이프 하나를 재생했다. 테이프에서는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노래도 아니고 뭔 라디오를 녹음해놓으셨대?’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찰나, DJ의 다음 멘트에 우리 가족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다음 사연입니다. 서울 공항동에 사시는 육ㅇㅇ씨가 보내주신 사연이네요.” 우리 가족 모두는 눈이 동그래졌고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와 우리 집에서 방송을 타는 사람도 나오는구나. 집에 온 택배들은 아빠의 사연이 당첨되어 온 경품이었던 것이다.


 내 기억이 유효할 때부터 우리 집 전축에서는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김기덕의 골든디스크>와 <강석, 이혜영의 싱글벙글쇼>는 우리 집 BGM과도 같았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 덕에 언니와 나도 머리가 크기 시작하면서부터 라디오를 매일 끼고 살았다.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은지원의 친한 친구>, <이민우의 키스 더 라디오>는 아이돌 덕질을 한평생 재미로 살아온 두 자매에게 최고의 선물과도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아빠의 유전자는 언니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언니가 고등학생쯤 됐을 때부터는 아빠가 아닌 언니의 이름이 적힌 택배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의류 교환권, 문화상품권 등등의 현금성 자산들의 상품들이 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청출어람이라며, 글로 용돈 버는 딸을 둔 엄마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자 이제 드디어 내 차례인건가요. 하지만 이러한 집안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글 쓰는 DNA가 없군’ 하며 학창시절을 보내왔다. 독서감상문은 세상에서 제일 싫은 숙제였고, 방학일기는 개학전 약 이틀동안 두줄남짓으로 몰아서 쓰는게 국룰이었다. 머리는 이미 다 커서 어느덧 30대를 앞두고 있던 때. 우리 정아 언니가 라디오 DJ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이름하야 <선우정아의 뮤직 원더랜드>


 매일매일을 DJ와 대화하는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DJ가 내 문자를 읽어주고 코멘트를 남겨 주는 게 그리도 기뻤다. 라디오를 핑계 삼아 가까운 팬들과도 어플을 통해 수다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많이 변해 그런지 사연은 그리 많지 않은 듯 보였다. 특히나 손편지는 더더욱. 나 역시도 장문의 사연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가끔 신청곡이 선정되어 선물이 오기는 했지만 가뭄에 콩나는 수준이었다. ‘아 역시 나는 DNA가 없군.’


 그러던 내가 지금 이 순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니. 사람일 참 모르는 것이다. 나도 육씨가 맞긴 맞았나 보네. 아빠는 여전히 SNS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시고, 언니도 이따금씩 동네 소식지에 글을 내곤 한다. 경품 DNA를 물려받는데는 비록 실패했지만, 나의 ‘족적’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거창하고, 삶을 잘 영위해나가고자 하는 하나의 ‘버팀목’으로서의 글쓰기를 계속 이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거봐! 나도 육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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