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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이세라 Jan 29. 2024

미묘해진 몸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소설 속 인물인 데제생트 공작이 디킨스의 책을 읽다가 런던을 여행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길을 나섰는데, 영어 책방에 들러 <런던 안내>를 사고 영국 선술집에 들렀다가 점점 여행에 대한 권태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정황을 보여준다. 

 

"실제로 여행을 하면 얼마나 피곤할까. 역까지 달려가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 누워야 하고, 줄을 서야 하고, 약한 몸에 추위를 느껴가며 베데커가 그렇게 간결하게 묘사한 볼거리들을 찾아 움직여야 하고.... . 그렇게 그의 꿈들은 더럽혀졌다. "의자에 앉아서도 아주 멋진 여행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직접 다닐 필요가 뭐가 있는가? 런던의 냄새, 날씨, 시민, 음식, 심지어 나이프와 포크까지 다 주위에 있으니 나는 이미 런던에 와 있는 것 아닌가? 거기 가서 새로운 실망감 외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데제생트는 탁자에 앉은 채 생각했다. "나의 유순한 상상력이 알아서 가져다 바치는 광경들을 거부하고 늙은 멍텅구리들처럼 해외여행이 필요하고, 재미있고, 유용할 것이라고 믿다니, 내 정신이 잠시 착란을 일으켰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데제생트는 계산을 하고 선술집을 떠나, 트렁크, 짐 보따리, 대형 여행 가방, 바닥 깔개, 우산, 지팡이와 더불어 그의 별장으로 돌아가는 첫 기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집을 떠나지 않았다."

 

"네덜란드를 다녀온 뒤, 그리고 영국을 가려다가 만 뒤, 데제생트는 다시는 해외 여행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별장에서 살면서 여행의 가장 훌륭한 측면, 즉 여행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물건들로 주변을 꾸몄다. 벽에는 여행사 진열장처럼 채색 인쇄물들을 걸어놓았다. 외국의 도시, 박물관, 호텔, 발파라이소나 라플라타 강으로 떠나는 기선을 보여주는 인쇄물들이었다. 또 주요 선박회사의 항해 일정표를 액자에 넣어, 침실에 한 줄로 걸어두었다. 어항에는 해초를 채우고, 돛, 항해 장비, 타르 단지를 사들였다. 그리고 이런 것들의 도움을 받아 불편은 전혀 겪지 않고 긴 항해 여행의 가장 유쾌한 측면들만 경험할 수 있었다. 위스망스의 말에 따르면, 데제생트는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더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 고 결론을 내렸다. 실제 경험에서는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때문에 정작 우리가 보러 간 것은 희석되고 만다. 우리는 근심스러운 미래에 의해서 현재로부터 끌려나온다. 당혹스러운 신체적, 심리적 요구들 때문에 미학적 요소들의 감상은 방해를 받는다. 

나는 데제생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냥 집에 눌러앉아 얇은 종이로 만든 브리티시 항공사의 비행 시간표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다."

 

데제생트의 경우, 그리고 방구석 여행을 좋아하는 나의 경우는 사실은 정신과 몸의 단절을 보여 주는 극단적 사례인지도 모르겠다. 세계와 몸으로 직접 부딪혀서 만나는 경험을 하기 이전에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온갖 '이미지'들이 주입되었기 때문인지도...

 

과거에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던 경험과 현대의 우리가 '바다'를 보는 경험이 같을 수 있을까? 우리는 처음으로 '바다'를 보기 이전에 이미 '바다'를 알고 있다. 상상으로만이 아니라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서 이미 '바다'를 봤다. 실제로 '바다'에 갔을 때, 영상에서 본 이미지들을 확인하거나 그 차이점을 느끼는 것 외에 바다와의 만남에서 어떤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데제생트에게도 영상의 경험만큼은 아니지만, 책을 보고 상상하고 반복되어 형성된 그만의 이미지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영혼이 깨어'있어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몸으로 직접 바다와 만나는 경험은 물론 영상 또는 상상의 경험과 확연히 다르겠지만 여행에서 몸이 무시되고 정신의 경험을 원한다면, 이미 바다는 전체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형성되었던 바다와의 '차이'만을 인식하게 만들 수도 있을 테니, 경이로움을 느끼기 이전에 '차이'로 인한 '발견' 또는 '실망감'만이 먼저 인식될 수 있었을 것 같다. 머릿속에서 무수히 반복되고 재생된 이미지들, 상상, 짐작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실제의 모습은, 경이로운 첫 만남의 순간이 될 수 없고, '차이'만 발견하게 될 테니까..

 

화면에서만 보았던 연예인을 실제로 만났을 때와 비슷한 경험들을, 우리는 코로나 이후, 줌으로만 만났던 사람들과 실제 대면하며 만났을 때 '연예인 만난 것 같다'는 말들을 수없이 반복하며 경험했다. 그래서 실제로 만났을 때 가장 처음 인식하게 되는 것은 화면과 얼마나 다른 지이다. 화면으로 봤을 때는 작아 보였는데, 실제로는 크다던가, 화면으로는 크게 봤는데 실제로는 작다던가 이런 식으로...

 

사실 이런 인식은 거의 '시각'에만 관련된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과 '시각'이라는 감각으로 만나는 것에만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다른 감각들의 예민함을 잃어버리고 시각에 지배되어, 여행지에서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다'가 주는 느낌은 분명 '이미지'로 보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를 거다. 실제의 그 '느낌'과 직접 만나기 이전에 이미 감각은 온통 '시각'만이 지배해 버려, 다른 감각들을 느낄 겨를도 없이 실망감에 사로잡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바다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을 때 온몸으로 스며드는 공기, 소리, 촉감, 느낌들이 어떻게 영상과 같을 수 있을까... 그래서 과학은 이제는 3D에 4D에... 촉각, 후각까지 재현하는 영상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장 강렬한 감각인 '시각'에 이미 사로잡혀버린 마음은 아름다움을 '시각'으로만 인지하기 바빠, 세계와 직접 만나는 경험들에 '실망감'만 가득한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도 시각이 전하지 못하는 고유의 '느낌'이란 것이 있다. 이제는 그 느낌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 같다. 그 느낌에 분명 '시각적 요소'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사실 '외모 지상주의'는 시각의 관점으로만 보고 평가하겠다는 '주의'일 것이다. 그러니까 젊음이 더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지만... 이제 나에게 '젊음'만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감각'을 가지게 되어 '시각'에만 속지는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몸으로 세계와 부딪히는 일에는 자꾸 움츠러들기만 하고 소극적인 듯하다. 불균형하게 과도하게 자라버린 정신의 문제 때문에 그런 걸까? 그런데 이런 비교조차... 지금도 여전히 정신과 몸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해 생각하며 이쪽이 옳으냐 저쪽이 옳으냐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몸'의 경험을 오직 '시각'에 국한해서만 생각하고 비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생각의 습관의 굴레 속에 아직도 본능적으로 사로잡혀서...

 

올해 초에 오고 갔던 이런저런 말들 중에 포착되어 그 이후로도 불쑥불쑥 반복해 떠오르는 말들 중에 '미묘해진 몸'이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미묘해진 몸'이라는 표현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이것은 정신의 문제인지 몸의 문제인지에 관한 질문이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뇌 가소성'이 생각났다. '뇌 가소성'으로 변해가는 것은 몸의 문제일까, 정신의 문제일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처럼... 끝없이 반복되고 돌고 돌아올 뿐인 질문... 정신이 발달하면서 더욱 미묘해진 몸이 되는 것은... 몸에도 뇌 가소성과 같은 반응으로 인해 변화가 있기 때문이며 몸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정신이 또한 더욱 발달할 수 있게 되는...

 

아무튼 발달된 정신은 미묘해진 몸을 만들어 감각이 더욱 예민해질 테고... 그렇게 해서 정신이 발달함으로 인해 몸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걸 텐데... 정신과 몸을 대립구조로만 생각한다면 정신이 발달하여 몸으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된다는 사고에만 사로잡혀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글자는 시각을 통해 인지되지만 글자를 감각으로 인지하는 차원을 벗어나 정신의 무한한 확장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에 '글자 자체의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감각이 발달하면 캘리그래피나 서예 등이 자극하는 시각적 즐거움으로 빠질 수 있겠지만 '의식의 확장'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버리게 하는 대표적인 매체가 글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책'에 빠져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음악의 경우 음악의 감각에 더욱 '미묘해진 몸'이 아니었더라면 귀에 부딪혀오는 '청각'의 감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미묘해진 몸'을 타고 올라오는 신호들은 확장된 의식 속에서 무한한 세계를 느낀다. 오래전에 음악을 들으며 인지했던 것은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의 세계'였었다. 그래서 그 세계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상대방을 만나면 고향 사람을 만난 것보다 더 반가워 우리는 그 사람에게까지 빠져드는 거였겠지... 그리고 오래전에 작품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들과 정신적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교감하며 영혼 속의 친교를 마음껏 나누는 것이다. 책을 통해 작가들과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오랫동안 마음의 말을 꺼내지 못하고 겉으로만 만나온 사람들보다 글로 만난 사람들이 더 빨리 친밀해지는 이유일 테고...

 

서예나 캘리그래피 같은 것들도 사실은 시각적 만족감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육체의 노력과 정신의 힘이 시각을 통해 전달되어 오는 그 '정신'을 느낄 수 있다면 의식으로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는 '감각' 이상으로 정신에 깊숙이 다다를 수 있을 거다. 그래서 각자의 경험들로 미묘해진 각자의 몸만큼... 그렇게 몸의 감각들은 정신으로 더 무한히 확장되어 가고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정신의 확장인 것일 테니... 어쨌든 그 예술도 '미묘해진 몸'을 통해야 흘러나올 것이며, 또 다른 '미묘해진 몸'과 만나야 뇌 가소성으로 잘 배선된 몸으로 입력되고 전달되어 깊숙한 정신에까지 이를 테니까...

 

그래서 몸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과 만나서 더욱 미묘해지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새로운 '글자'와 만나더라도 '미묘해진 몸'은 가능하기에 정신만이 비대해지는 일은 아닐 수도... 그래서 책 한 권만 있으면 든든한 '여행'처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더욱 '미묘해진 몸'이 되어야 그 글자들이 무한한 정신의 확장에까지 이를 수 있을 텐데 세계는 글자의 인식 단계에서 막혀버리고, 특히 '시'에서처럼 글자는 더 이상 글자 이상으로 그 시의 세계 속에 깊이 다다르지 못하거나, 자신의 왜곡된 인식에 따라 더 왜곡되게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세계를 더 잘 인식할 수 있는 '미묘해진 몸'이 필요하지만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보고 거인이라고 인식해 버리면 곤란할 테니까... 세계를 왜곡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비틀어지게 왜곡된 몸이 아니라 '미묘해진 몸'이 필요 한지도 모르겠다. 

 

요즘 세계는 사실 미묘해진 몸이 아니라 정신이 왜곡되게 과도하게 발달하여 비틀어지고 왜곡된 몸만이 가득해졌기 때문에 몸에 비해 과도하게 '비대해진 정신'이 문제가 되는 것일 테고, 그렇다고 미묘해진 몸에 따른 '정신의 발달'마저 부정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정신의 발달' 자체가 '미묘해진 몸'에 이르는 몸의 발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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