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지프
완성에 대한 집착, 결과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발걸음을 주춤하게 만들거나 과정을 대충 건너뛰게 하고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게 만드는 요인이었을 거다.
글을 쓸 때도 그렇고, 악기를 연주할 때도 그렇다.
훌륭한 문장들과 완벽한 연주에 대한 이상은 머릿속에 이미 형상화되어 있고, 그 이상을 향해 가고자 하는 발걸음은 조급해지고 매 순간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 도달하기에는 수많은 반복과 연습이 필요할 텐데,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그 차이와 격차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먼 곳으로만 느껴져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꼭 거쳐가야만 하는... 결과에 대비하여 상대적으로 느리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훈련의 과정을 더욱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피아노를 칠 때, 내 손가락은 자꾸만 빨라지고 조급해진다. 음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연주해 내기보다 성급하게 건너뛰어 다음으로 무난하게 넘어가기만을, 그래서 악보의 마지막까지 틀리지 않고 빨리 연주해 내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
전체적인 완성보다, 순간순간의 마디, 음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대충 누르고 완성을 향해 달려가기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배울 때는 언제나 안 되는 부분은 천천히 또박또박 연습해 보라고 요구받았을 거다.
음 하나라고 하찮게 보아 대충 누르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음 하나하나에 온 영혼을 담아 충만하게 연주할 것. 그래야 전체적으로 완벽한 연주에 가까워질 것인데, 급하게 달려가고자 하는 마음은 그 중요성을 놓치게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얼버무리면서 살아왔는지...
내 연주 태도에서도 이제야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케스트라의 큰 소리에 묻어가며 얼버무렸던 그 순간들은 독주자가 되는 순간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혼자 연습할 때는 내 소리를 견딜 수 없어 악기를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에 매번 굴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완벽한 연주에 대한 이상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격차는 더욱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을 거고, 그런 악순환은 좋아하고 사랑하던 것들과 더욱 멀어지게 만들고 결국 포기해 버리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거다.
전체적인 완성에만 급급하여 순간들에 필요한 성실성을 무시했던 결과는 전체적으로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흉내내기에 성공적이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서 그 결점들은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 것들은 외부에도 자신 없는 태도로 고스란히 드러났을 거다.
양재동에서 지난주까지 연습했던 연습 장소에는 피아노가 있는 몇 개의 작은 연습실이 더 있었는데, 다른 연주자들과 연습시간이 겹쳐서 노래 부르거나 피아노 치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중에 쇼팽의 연습곡 4번(추격)을 연습하는 소리가 있었다.
귀에 익숙했던 빠른 연주와는 다르게 느리게 연주되었지만 소리 하나하나가 분명하고 충만하게 들려왔다. 결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도 오랜만에 악보를 펼쳐 쇼팽의 연습곡을 느리게 연주해 보고 음 하나하나의 소리에 집중해보고 있다.
내 손가락은 그 마디에 충분히 머무르지 못하고 다음 마디를 연주하고자 나아가기 바빴을 거다. 그렇게 빠른 연주는 매 순간을 음표로도, 쉼표로도, 충분히 채우지 못하고, 다음을 향해 나아가기만 했다.
쉼표에서조차도 충분히 머무르지 못하고 다음 마디에서 시작되는 음표를 연주하기 위해 조급했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악보를 다 연주하고 나면 어차피 남는 것은 없다. 음악은 특히... 연주하는 그 순간들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기에 허망하고 헛되다고 느꼈을지 모르겠다.
미술 작품은 결과물이라도 남지만, 음악은 그 시간들 속에서만 소모될 뿐이라...
영상으로 녹음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라도 각인되지 않는다면...
나 혼자 연주하는 그 모든 순간들은 빠르게 연주하든, 느리게 연주하든, 완벽하게 연주하든, 틀리게 연주하든... 그 시간과 순간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조급했을까....
왜 그렇게 빨리 연주하고 음을 건너뛰듯이 얼버무리며 끝을 향해 달려가려고만 했을까...
오랜만에 오케스트라 연습에 참여하며, 생각보다 소리가 잘 나고 손가락이 잘 돌아가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마냥 즐겁게 참여하고 있었지만, 악보를 같이 보는 옆자리 선배님께서 "언제 한 번 네가 느린 곡을 연주하는 걸 들어보고 싶다"라고 하신 말씀에 순간 얼음이 되었었다. 여러 사람들의 소리에 묻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적당히 잘하는 것처럼 연주하는 묘기는 부릴 수 있지만 과연 나는 느린 곡을 듣기 좋게 연주할 수 있을까? 당연히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의 연주실력에 대해 예민하고, 예리하게 보는 눈을 가진 선배의 그 말은... 후배의 진정한 실력을 알고 싶다는 뜻이었을 거다. 어릴 적부터 배우지 않았는데도... 오랫동안 악기를 쉬었을 텐데도... 잘한다고 하는 칭찬들 속에서 기고만장해지려던 마음은 그 대답을 생각하니 바로 풀이 죽었다. 내 입에서는 자신 없는 변명만 흘러나왔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성실함은 없었다. 대충 흉내 내다가 포기하는 수준까지밖에...
그러니 오케스트라에 대충 묻어가며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는 있었지만 독주는 자신이 없었겠지...
음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성실하게 소리 낼 것.
삶의 한 부분들, 순간들마다에 성실할 것도 음악 연주와 마찬가지이다.
삶의 완성과 결과에 대한 집착으로 과정은 대충 생략하고 건너뛰며 빠르게 달려가려고만 했던 것은 세상이 만들어 낸 '성공신화'들에 휩쓸렸기 때문일 거다.
거장들의 완벽에 가까운 연주가 위대한 것은 연주자의 순간순간의 성실함들이 그 연주 속에 담겨 결과물로 나타났기 때문에 거장들의 그 인생 자체에 경이를 느끼는 것이지, 우연히 나타났을 수도 있는 그 결과물 자체가 경이로운 것은 아니다.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천재성보다, 오랜 활동으로 증명해 온 그 과정들에 느껴지는 경이로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그 사랑과 성실성과 천재성과 그 모든 것들이 결합된 그 인간 자체에게 존경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일 거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연주하고 음악을 사랑하고 성실하게 바윗돌을 굴리는 그 순간들에 있는 것이지, 결과를 향해 빨리 달려가고자 하는 마음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입자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 p185 / 민음사)
카뮈의 <시지프 신화> 마지막 구절이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 같다.
돌의 입자 하나하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돌의 입자 하나하나'를 피아노 건반으로 연주하는 음표 하나하나에 대입하고,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를 성실하게 연주된 음 하나하나에서 발현되는 그 충만한 소리들과 음악성으로 대입하면... 신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완성된 음악을 향한 순간순간의 발걸음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며,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볼 수 있다는 것...
"인간이 그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행위들의 연속을 응시하고... 시지프는 여전히 걸어가고,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p185) 지지만...
허망하기 때문에 자살해야 하는 시지프가 아니라 행복한 시지프가 가능해지는 것이리라...
그래서 연주되는 결과물이 아니라 내 앞에 놓여있는 악보들에 충실할 것. '음 하나하나'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어차피 끝나버릴 끝을 향해서만 달려갈 것이 아니라 순간에 집중해서 성실하고 충분하게 소리 낼 것.
그리하여 음악이 끝나버려 연주가 좋았니 나빴니 하는 결과에 집착하고, 허망하고 허탈할 것이 아니라, 성실하고 충분하게 소리 낸 그 순간들에 만족할 것.
그래서 공연하는 날만 화려하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연습하는 날 하루하루'가 모두 다 나에게는 소중한 날들일 것이다.
인생 자체도 그럴 것이고...
글쓰기도 마찬가지... '책을 낸다'는 거창한 행위보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더욱 집중하고 충실해지고 싶을 뿐...
'책'이라는 결과물에만 집착한다면 바윗돌을 다 굴리고 난 후에 허탈한 시지프밖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공연'이라는 결과 또는 목적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면 공연이 끝난 후 여지없이 밀려들던 허탈감이 아니라... 더욱 충만해지고 행복한 시지프일 수 있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