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 07
루치아노 파바로티 (1935 ~ 2007)
울림통이 남보다 컸고, 풍부한 성량과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천부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숯같이 검은 눈썹은, 그의 음악적 내공을 대변해 주었다. 세계최고의 테너로 한평생을 풍미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테너다. 남자의 성악 모든 음역을 통틀어, 가장 인기를 많이 받았던 성악가다. 내가 그를 TV에서 직접 보게 된 것은, ‘쓰리 테너 콘서트’ 덕분이다.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테너 가수는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3명이었다. 이들이 같이 콘서트를 하게 된 것은, 카레라스의 암 완치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 전야제 공연에서, 로마 카라칼라 목욕탕을 무대로 주빈 메타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했다. 당시 실황앨범은 데카 클래식 앨범으로는, 최고의 판매량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후 월드컵마다 계속 자선무대를 했지만, 2006년에는 파바로티가 세상을 떠나면서 갖지 못했다. 이 자선투어는 클래식 음악의 문턱을 낮추고, 대중 속으로 들어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제빵사이며, 아마추어 성악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육학을 전공해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어머니가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게 해 주면서 천부적인 자질을 가다듬었다.
1970~80년대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전성기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오페라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노래를 부를 때 하얀 손수건을 들고, 관객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자신의 신체적 콤플렉스를 극복했다고 한다.
그는 하이 C라는 남자의 가장 높은 음역을 최고로 잘 표현하는 테너였다. 높은 음역에서 밀어내듯 뻗어 나가는, 맑고 깨끗한 음성은 그만의 장점이었다.
그는 1972~2003년까지 고향 모네다에서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라는 작은 음악회도 매년 개최했다. 엘턴 존, 머라이어 캐리, 스티비 원더 등 당대 최고의 팝 아티스트들과 크로스오버 공연을 했다.
2006년 토리노 올림픽 개막식에 마지막 등장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망가져 립싱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테너의 거장인 그가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음악을 위한 삶은 환상적이었고, 그로 인해 나는 인생을 음악에 바쳤다.”
쓰리 테너 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실력의 소유자인 그가 떠난 뒤, 쓰리 테너 콘서트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는 악보를 잘 볼 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뛰어난 청각과 목소리가 그런 음악적 핸디캡을 딛고, 그를 우뚝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