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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버섯 Apr 09. 2023

어디에 '살고' 계시나요

아이는 매주 그림책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림책을 보며 아이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곳. 아이들의 일주일의 랜드마크가 되는 곳.

편안한 곳. 재미있는 곳. 신기한 곳이다.


오늘은 아이들이 마을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다 함께 만들어낸 마을에는 '공사 중'인 구역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신도시에서 자란 아이들.

그렇다. 아이들이 제일 많이 본 장면 중 하나는 자연이 아닌 공사장이었다.


둘째를 데리고 어린이집에 가는 길에 아이는 매일 '크레인'을 외쳤다. 새 아파트를 짓는 몇 개의 구역을 지나면 아이의 어린이집이 나왔다. 도로의 확장과 변경이 계속되는 탓에 늘 공사 중인 도로를 통과해야 했다. '공사 중'은 일상 속에 가장 자주 보이던 단어 중 하나였다.


10여 년 전에는 마을에 개구리소리가 가득했다. 거름냄새가 나면 봄인 줄 알았다. 밭을 갈고 거름을 주며 마을은 한 해가 시작되는 듯했다. 여름에 창문을 열면 개구리 소리가 귀를 찔렀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개구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잠에 드는 날은 꼭 외할머니 집에 온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마을에 지하철이 생긴다는 소문이 돌더니 곳곳에 펜스가 쳐졌다. 아파트 몇 개가 생기려나보다...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공사는 10년이 넘게 지속되었고 마을은 '신도시'가 되었다. 8차선 도로들이 생겨나고 새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도로들을 에워쌌다.


곳곳에서 새 아파트를 짓고 있다 보니 사람들의 대화의 주제는 집이 자주 등장했다. 정확히는 집이 아니었고 '부동산'이었고 '집값'이었다.

아파트별 집값은 곧 생길 지하철 역에서 멀어질수록 계단처럼 한 단씩 낮아지고 있었다. 지하철 가까이 있는 아파트 단지들은 묶여서 별칭으로 불리곤 했다. 그곳에 산다고 하면 의례히 들 집값의 오름새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그런 대화에서 피곤함을 느꼈다.


계속 커질듯한 풍선 위에 서있는 기분. 풍선은 커지고 나는 계속 조금씩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지만, 사는 것이 편안하지 않고 불안한 느낌이었다. 늘 움직이는 무언가에 얹혀있는 기분, 붕 뜬 기분으로 사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게 유쾌하지 않았다.


남들에게 때로 나는 성장이 무섭다고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나는 성장하는 세상에서 패배자로 남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거센 세상의 물결에 올라 함께 힘차게 흘러가기엔 용기가 부족했고, 큰 물결이 되어가는 것을 마냥 지켜보기에는 관용이 부족했다.

 

또 다른 도시의 끄트머리 어디쯤에 살고 있는 지금,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계속에서 '성장'해야 한다고 나를 다그치고 옭아매던 강박에서 천천히 벗어나고 있는 요즘, 난 매일 산책을 하며 길가의 꽃이 피는 것을 관찰하고 지낸다.

며칠 전 작은 알맹이 같았던 길가의 꽃몽우리에서 작은 꽃송이가 터졌다. 이제 곧 마을은 알록달록 꽃들로 가득하겠지.


사는 곳을 내가 선택해서 내가 가꾸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사는 곳이 나를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느낀다.


다시 한번 '집'은 부동산이 아니라 '삶'을 만드는 곳이라는 것을 되뇌여보며, 아무렇게나 만화책을 보며 깔깔깔 웃고 있는 아이들과 오후에는 꽃을 보러 산책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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