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몇 회에 걸쳐
건물주 아이 키우기 협회의 탄생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의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고, 협회 설립 이야기도 하다.
나를 이해하고 협회를 이해하면, 어떻게 건물주 부자가 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다소 길다 (스크롤 압박 주의!!!)
정말 관심 있는 사람만 읽기를 바란다.
나는 강남 삼성동에서 태어났고, 8 학군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이 이유만으로 성장하면서 나는 당연히 금수저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친척 모두 강남에 살았다. 심지어 친척들이 다 잘 살았고, 돈도 많았다. 친척 모임을 할 때마다, 좋은 곳, 좋은 음식, 좋은 차를 봐왔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인생도 당연히 동일한 레벨에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학창 시절인 90년대 당시 강남에서 조금 더 부자들은 압구정동, 청담동에 살았다.
강남 안에서도 부의 기준에 따라 사는 곳은 나누어졌었다. 당시에는 그런 사실까지 몰랐기 때문에 강남이면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친척들보다 다소 못 사는 것은 알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했다.
왜?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돈을 많이 버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다.
내 아버지는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항상 외쳤다. 그리고 공부해야 더 좋은 직업을 가지고 더 많은 돈을 번다는 주의였다. 어머니 역시 이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말 잘 듣는 아들이었기에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머리가 좋은 학생은 아니었지만, 타고나기를 성실한 스타일이다. 열심히 공부를 했고, 결국 고려대학교 전기전자 전파 공학부에 입학했다. 대학교 때는 나름 뛰어나 보이고 싶어서, 벤처회사 무리에 끼어서 일도 해보고, 해외 취업을 한다고 해외 체류하며 직장을 구해 보기도 하고, 정규 경력 없이 MBA를 간다고 공부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끝까지 해낸 것은 없다. 핑계이기는 한데, 이 모든 노력의 목표는 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있어 보이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어떤 큰 성과를 이루어 내지 못하고, 20대 후반이 되어서 결혼이라는 과제가 생기자, 성공적으로 과제를 해내기 위해 재빠르게 취업했다. 20대 시도한 일들의 실패에 대한 깨달음은 "안정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회사도 대기업 중에 나름 정년이 보장되는 곳을 선택했고, 부서도 안정적인 엔지니어 직군으로 취업했다.
나름 결혼도 잘했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회사를 다니기에 최고는 아니지만 성공스러운 삶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돈을 벌지는 않았지만, 회사에서 참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적인 성공이 부자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 것이다.) 당시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소득 수준이 꽤 높은 편이어서,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변화가 생겼다.
아이가 태어났다. 그것도 남아 쌍둥이..... 헉....
(여성 분들은 이 대목에서 다 우리 와이프를 애처롭게 바라본다. 맞다. 정말 와이프 고생 많이 했다.)
와이프는 자연스럽게 경력단절녀가 되었고, 외벌이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아이가 태어나나고 지출해야 될 돈이 더 많아졌다. 외벌이인데 생활비는 더 들어가니, 결국에는 마이너스 통장을 뚫는 일까지 발생했다.
당시 머물던 집은 회사 사택. 돈이 안 들어가서 좋다고 생각하며 들어갔던 곳.
(경제 문제의 시작이기도 하다. 실제 빚져서 고생하더라도 사택을 들어갈 것이 아니라 집을 샀어야만 했다. 경제 지식이나 경제 원리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더 경제 수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사택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4년까지만 살 수 있는 곳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적 안정도 없고, 지출 대비 수입 구조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루어 낸(?) 사회적 성공 탓인지...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버티었다. 변화가 필요함을 알았지만,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한다면 내가 있는 사회 속에서 더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 것일 뿐이었다.
(회사라는 곳에서 내가 더 노력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침 6시 반에 출근했고, 밤 8시에 퇴근했다. 그리고 퇴근 후 육아에 전념하다가 10시부터 자기 전까지 자기 계발 쪼의 공부를 했다. )
당시 내가 바라는 꿈이라면, 외국계 기업 취업이나 이민을 생각했다.
나름 헬 조선을 외치며, 한국에서는 불가능해 를 속으로 외쳤고,
영어 공부 열심히 하면서 (당시에 불어에 중국어 공부까지 했다. 어느 나라든 가겠다는 확고한 의지!!!)
해외로 나가는 꿈을 꾸었다.
그렇게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성실함과 노력 덕분인지 회사 내에서 진급은 잘 되었다.
하지만 집안 경제사정은 전혀 좋아지지도 않았고, 돈 이야기, 돈 문제로 와이프와 다투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하루는,
와이프가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책을 보여 주며 보라는 것이다.
이미 10년도 전에 읽었던 책인데,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읽었다.
다 아는 내용인데, 돈에 대해 궁해지고, 돈이 알고 싶어 져서 인지
책 속에 나온 내용은 매우 매우 새롭게 느껴졌다. (수입구조의 변화, 자산-채무 등의 관계 등)
그때부터 각종 재테크 책이란 책은 다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은 내용을 실행해 옮기기로 결정했다.
주식이나 펀드 같은 실물 자산이 없는 종목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실물 자산이 보장된 부동산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수십 권 아니 수 백 권의 책을 보았고, 부동산 투자를 잘하기 위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임장을 했다.
가진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별의별 수단을 다 써가며 투자를 시작했다.
결과적으로는 수익이 좋은 것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있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종잣돈이 없는 상황에서는 더 많은 투자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부동산 투자는 복리의 비밀, 스노 볼의 효과가 있지만, 처음 매우 매우 느리다. 그리고 이 시간을 버티는 것이 제일 어려울 수 있다.
이 속도를 빨리하기 위해서는 내 수익을 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회사와 부동산 투자를 동시에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당시 회사 업무는 점점 더 많아졌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회사라는 이유로 선택했는데, 내가 있던 부서는 (나름 회사 내 핵심 부서여서 인지) 일이 정말 많았다. 일이 많아지는데, 나는 집중을 못하니 회사에도 민폐였다.
일은 많고, 돈 안 안되니, 점점 회의적으로 변해 갔다.
그러던 중 돈을 빨리 많이 벌고 싶으면, 영업이 최고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업 직군에 있는 사람들은 억대 연봉자가 많다는 것이다. 전에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사실 영업에 대한 이미지가 다소 좋지 않았기에 꺼려했었다.
하지만 나에게 선택지는 없었고, 변화가 필요했다.
기왕 영업을 할 거면 부동산 투자를 하고 있으니 부동산 영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첫번째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