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난 8년을 기록하다
정 선생님 되시나요? 몇 달 전에 교통사고 나셨죠? 그 사건 담당 검사입니다.
아, 예. 검사님. 무슨 일이신가예?
교통사고 피해자인 정 씨에게 전화했다. 혹시 차에 후방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었는지 물었다. "그기 벌써 한 세 달 지났잖아예. 벌써 지워졌다 아입니까. 쪼매 일찍 전화 주시지 그랬으예, 검사님." 그 말에 상반된 두 종류의 감정이 마음속에 섞였다. 하나는 아쉬운 마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할 만큼 했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마음 편히 손쉽게 사건을 털어버릴 수 있어 다행이라는 마음이었다.
따르르릉. 검사실 전화가 울렸다. 정 씨였다. "검사님! 블랙박스요. 보험회사 직원한테 보내준 적 있는데예. 그기 연락해 보이소." 순간 모른 척해버릴까 하는 유혹이 들었다. 행여나 황은혜가 운전을 했다면 최치훈의 기존 혐의에 대해서는 불기소결정서를 작성해야 하고, 최치훈은 범인도피죄로, 황은혜는 도로교통법위반(음주운전),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죄로 인지해야 하겠지? 두 사람을 다시 조사하고, 범죄인지서와 인지보고서를 작성해야 할 테고……. 그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칠 생각을 하니 벌써 지쳤다.
뚝 검사라고 합니다. 정 선생님 보험담당자 되시나요? 블랙박스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네! 그거 보험금 지급 때문에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로 보내드리면 되겠습니까?
보험담당자는 이메일로 정 씨의 블랙박스영상을 보내주었다. 영상에는 교통사고 장면이 담겨있었다. SUV를 향해 달려오던 승용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SUV의 꽁무니를 들이받았다. 전조등 불빛이 번져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앉은키가 큰 사람이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 사람은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최치훈 씨, 정말 운전했습니까?", "네, 제가 운전했어요." 다시 물었지만 최치훈은 끝까지 자신이 운전을 했다고 말했다. 최치훈에게 만약 또다시 음주운전으로 처벌 받으면 실형을 살 수밖에 없고, 지난 집행유예 판결까지 실효되어 그 형까지 살아야 한다고 겁박 아닌 겁박을 했지만 최치훈은 단호했다. 블랙박스 영상까지 보여주었지만 술에 취해 모자를 바꿔 쓴 모양이라고,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끝까지 황은혜를 감싸고돌았다. "후우, 이거 한 번 읽어보세요." 최치훈에게 황은혜의 경찰 진술조서를 던져주었다. 최치훈은 조서를 읽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문 최치훈과는 무슨 사이인가요.
답 그냥 아는 오빠 동생 사이입니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최치훈은 한참을 허공만 보다가 황은혜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서 음주운전으로 처벌을 받으면 안 된다고 걱정하기에 자리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어차피 두 번의 음주운전 전과가 있는 망한 인생이었으니 아무렴 괜찮았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황은혜를 마음에 두었고, 가끔 자신을 찾으면 달려갔다고 했다. 당연히 연인 사이로 생각했고, 시험이 끝나면 결혼을 하려고 돈도 열심히 모았다고 했다.
최치훈 씨, 그게 사랑입니까.
벌을 받으면 그때만 아프지만 비겁하면 평생 아픕니다. 그런 짐을 황은혜한테 지우려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한다면 어떻게든 죗값을 치르게 해주는 게 맞지 않았을까. 사랑이란 일방이 모든 걸 감내하고 희생하고,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고난에 부닥쳐도 함께 이겨내고, 서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아닐는지. 물론 나도 이제야 그것을 깨달아 헛헛한 마음이 든다.
며칠 뒤, 최치훈은 범인도피죄, 황은혜는 도로교통법위반(음주운전)죄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죄로 함께 법정에 섰다. 최치훈은 그곳에서 모든 사실을 다 털어놨지만 끝까지 황은혜를 감쌌다. "제가 황은혜를 좋아하는 마음에 거짓말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황은혜가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거짓말 한 잘못은 저에게 물어주셨으면 합니다."
최치훈은 실형을 선고 받았고, 황은혜는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어긋난 사랑의 끝은 새드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