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난 8년을 기록하다
방청석은 가득 차 있었다. 벌써부터 가슴을 부여잡은 채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하고 있는 방경자 여사부터 노트북을 무릎에 두고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고 있는 기자들까지. "일어나주십시오." 법정에 들어서는 재판부를 맞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부터 ○○지방법원 2019고합○○호 피고인 곽호연의 상해치사 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장은 준비해 온 판결문을 꺼내어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공소사실을 읽고, 공판에서 오갔던 검사와 변호인의 주장을 정리했다. 마이크를 통해 법정을 가득 채우는 재판장의 목소리에 다들 숨을 죽이곤 귀를 기울였다. 재판장은 옅은 기침을 내뱉고는 이내 판단을 말했다.
<재판장>
먼저 피해자가 신음소리를 냈다고 하는 11:14경부터 불과 2분 전의 통화에서 피고인과 피해자가 심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정황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또,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 당시 피해자를 폭행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으며 피해자의 몸에서 상당한 멍이 발견되었지만 알코올성 간 질환을 앓고 있어 멍이 쉽게 생기는 피해자에게 이 사건 당일 새벽이나 응급 처치 중 멍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남아있습니다.
한편, 피고인이 수사기관에서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피해자가 스스로 넘어졌다고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고, 스스로 119에 전화를 걸고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는 등 피해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했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아울러 피고인이 범행을 은폐하려고 사건현장을 정리하거나 치워버리는 시도를 했다고 볼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여기에 경막하출혈은 외상이 가해지는 모든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거니와 전도되어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친다고 하여 반드시 경막하출혈과 뇌맞충격타박상이 동반된다고 불 수 없는 점, 피고인이 피고인의 누나에게 보낸 '살인범이 되겠다'는 문자메시지는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이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일 여지가 있는 점, 판례의 태도에 비추어 거짓말탐지기 결과는 증거능력이 없는 점을 더하여 아래와 같이 판단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다음과 같이 선고합니다. 피고인은 무죄.
유족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막상 무죄를 선고받으니 혼란스러웠다. 나의 첫 무죄 사건이었다. 여태껏 기소한 모든 사건이 유죄였다. 무죄를 선고받는다고 해서 검사에게 불이익이 있지는 않지만 마음이 착잡했다. 이날 집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방바닥에 앉아있었다. 검사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들이었다. 무죄라…… 무죄라…….
애먼 사람을 기소해서 고생시킨 걸까. 아집이 만들어 낸 확증편향이었을까. 내가 중요한 단서를 놓치는 바람에 무죄가 선고됐을까. 다른 검사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나로 인해 피해자는 세상에서 의미 없이 지워진걸까. 죄책감, 자책, 후회 따위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날은 꼬박 밤을 새웠나 보다.
선배들이 가끔 사건은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한다. 제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사건도 무죄가 날 사건은 무죄가 나니 행여 무죄를 선고 받더라도 마음쓰지 말라는 말이다. 운명론에 싸여 사건 처리를 대충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최선을 다했음에도 무죄가 선고되었다면 인정하고 결코 자책하지 말라는 의미일테다.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은 스스로를 좀먹을 테니.
하지만 사건당사자를 끝의 끝까지 신경써주는 사람이 한 사람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만다. 사건 속에 푹 빠져 사건당사자들이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이 내가 느끼는 과정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검사 경력이 늘어갈수록 나와 사건 사이 아름다운 거리를 두는 방법을 배워야 할텐데 언제쯤에나 그 거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 아직도 이정표를 찾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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