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 〈가족의 탄생〉, 김태용 감독
개운치 않았다. 이 영화는 오래전부터 나의 7년 영화 친구의 추천을 받아온 작품이었다. 그와 나의 영화 취향은 매우 비슷하고, 그는 나에게 〈만추〉를 추천해 김태용 감독을 알게 해 준 장본인이었기에 기대가 컸다. 그런데 영화는 어딘가 개운치 않다는 느낌을 남겼다. 가장 큰 의문을 안긴 것은 대사였다. "원래 이렇게 모르는 남자들이랑 쉽게 잘 친해지시나 봐요?", “나한테 왜 이래” 등 어색하거나 클리셰적인 대사는 인물과 에피소드에 현실감을 부여하지 못하고 이것이 영화임을 자꾸만 상기시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왜 영화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이런 대사들을 사용해야 했을까. 그러고 보면 “나한테 왜 이래”라는 대사는 영화를 크게 구성하는 세 이야기에 각각 한 번씩 등장한다. 우선 첫 에피소드에서 오랜만에 찾아와 무리한 요구를 하는 형철에게 화난 미라가 처음 내뱉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선경이 헤어짐을 두고 준호와 다툴 때도 같은 대사를 하며,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다른 사람만 신경 쓰느라 바쁜 채현에게 폭발한 경석 또한 같은 말을 한다.
이러한 같은 대사의 반복을 통해 영화는 같은 주제로 서로 다른 세 개의 에피소드를 짜 맞춘 옴니버스 구조로 느껴지기도 한다. 첫 시퀀스에서부터 영화는 채현과 경석의 기차 대화 장면, 선경의 관광 가이드 면접 장면, 그리고 떡볶이 장사를 하는 미라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고, 이후 이 인물들의 이야기를 역순으로 보여준다. 특히나 옴니버스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선 각 에피소드가 다루는 인물들의 주요 갈등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각 에피소드는 미라와 형철 커플의 갈등, 선경과 그를 떠나는 주변인들 간의 갈등, 그리고 채현과 경석의 갈등까지 세 가지 관계에서의 갈등을 다룬다. 또한, 하나의 에피소드가 나올 때 다른 에피소드에서의 주요 인물들은 의도적으로 감춰진다. 에피소드 1에서 어렸을 적 채현이 등장하긴 하지만 에피소드 3에서 등장하는 채현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경석과 채현이 채현의 집에 찾아가는 신에서야 확실해진다. 해당 씬이 등장하기 전까지 채현의 가족 이야기를 전혀 다루지 않음으로써, 영화는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처럼 구분하는 것이다.
이렇게 평행으로 전개되던 이야기는 영화의 말미 ‘가족의 탄생’을 보여줌으로써 비로소 하나가 되며, 그제야 관객은 이 영화가 옴니버스가 아니라 세 챕터로 구성된 하나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첫 시퀀스는 세 개의 장면을 시간상 역순으로 나열하여 과거로 향하는 장치였고, 이후 시간상 가장 오래된 미라와 형철 커플의 에피소드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관객은 채현이 이전에 형철이 데려왔던, 무신과 미라 아래에서 자란 아이임을 알게 되고, 경석은 이전에 선경에게 대들던 이복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이렇게 의도적으로 세 개의 에피소드를 구별하는 옴니버스적 서사구조가 인물을 이해하는 데 좋은 전략은 아니다. 세 이야기가 영화의 말미에야 비로소 통합되기 때문에, 관객은 영화가 모두 끝나고 난 후 머릿속에서 서사를 재결합해야만 인물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채현이 경석의 말마따나 ‘헤픈’ 것은 어렸을 적 자신을 어떠한 조건 없이 ‘가족’으로 받아들여 준 무신과 미라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고, 경석이 그런 채현을 ‘헤프다’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누나 선경의 눈치를 보았을 경석의 상황이 깔려 있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러한 관계들의 세부에는 조금 불친절해지는 대신, 어딘가 잘 통하지 않던 각각의 관계들이 어느 순간 우연히 하나로 모여 ‘가족’을 이루어내는 장면을 마지막에야 제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상가족의 궤도에서 벗어난 이 ‘가족의 탄생’이 갖는 특별함과 따스함을 전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투박함과 따스함을 오가는 영화의 톤 변화는 말미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물들의 갈등을 그릴 때는 장면 전환이나 시공간이 모호하게 그려져 투박함을 자아낸다. 이를테면 첫 에피소드에서 김 사장과의 술자리에서의 갈등 직후 나타나는 시퀀스에서 창문에 비치는 불빛은 햇빛인지 달빛인지 불분명하고, 그래서 해당 장면이 당일인지 다음날인지 헷갈리게 한다. 또 선경의 방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느낌이다. 인물의 행동에 연속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채현과 경석이 함께 장례식장에 갔다가 채현만 남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장례식장을 떠나는 경석의 모습을 여러 구도에서 연결해서 보여주지 않고, 뒤돌아 가는 채현을 바라보는 경석의 모습 바로 뒤에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이처럼 연결성이 떨어지는 장면들에서 느껴지는 투박함은 인물들이 경험하는 갈등에 싸늘한 느낌을 강화한다.
그런가 하면 인물들의 갈등에서 느껴지던 답답함과 차가운 느낌이 따뜻함으로 전환될 때에는 마법 같은 환상성이 빠르게 투박함을 대체한다. 선경이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꺼내 보며 눈물을 흘릴 때 물건이 떠오르는 장면에서는 물건들이 선경의 슬픔에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후 미라, 무신, 채현, 경석이 한자리에 모여 TV로 선경의 합창단 공연을 보는 장면에서는 선경이 갑자기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하늘 위로 떠오르는데,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하늘로 틸트 업 되었던 카메라가 다시 내려올 때는 야외에서 네 사람이 같은 불꽃놀이 장면을 관람하고 있는 듯한 장면으로 전환되어 마치 네 인물과 선경이 하나의 프레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따뜻함과 차가움 사이의 빠른 톤 전환은 드라마 〈원 데이 앳 어 타임〉에서의 커튼을 연상시킨다. 쿠바계 미국인 3대가 한집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시트콤에서 할머니 리디아는 방이 없어 거실에서 방문 대신 커튼으로 공간을 구분해 생활한다. 주거 공간의 협소함으로 공간을 개조해 지낸다는 이 설정은 이 가족의 관계와도 닮아있다. 온 가족이 모이는 공간인 거실과 리디아의 공간 사이에는 오직 커튼 한 장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리디아가 커튼을 열고 등장하는 유쾌한 장면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커튼만 젖히면 할머니가 있다는 사실은 가족과 리디아 사이 심리적 거리를 좁혀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편, 구성원들이 할머니와 갈등을 경험할 때에는 커튼이 문처럼 무거워지기도 한다.
〈가족의 탄생〉에서 드러나는 가족의 관계 또한 커튼 한 장처럼 가깝지만 멀다. 미라는 오랜만에 돌아온 형철에게 잘해주고 무신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다가도 어느 순간 화가 폭발하자 쌓인 모든 것을 쏟아낸다. 선경은 집에 찾아온 엄마를 문전박대하면서도 엄마의 가게 앞을 기웃대고, 막상 들어가면 경석과 엄마에게 화를 내지만 경석의 운동회에 찾아가 아이의 가족이 되어주기도 한다. 경석은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채현이 못마땅하지만, 어느샌가 다시 웃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에서 가족 관계는 늘 가변적이고 위태로우며, 이는 영화 중간중간 드러나는 급격한 톤 전환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인물들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자신들이 경험하는 혼란을 구체적인 문장이 아닌 ‘나한테 왜 그래’라는 뻔한 말로밖에는 설명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영화가 보여주는 다양한 갈등 속에서 가족은 ‘항상’ 싫은 사람도, 그렇다고 ‘항상’ 좋은 사람도 아니다. 죽을 만큼 미웠다가도 궁금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웃기도 하는 존재. 그런 존재가 나에게 안기는 감정은 아마 영원히 설명하기 어려운 속성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드러내고자 한 것도 그처럼 명확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차가웠다가 뜨거워지는, 가깝지만 먼, ‘커튼 한 장’의 거리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