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쓰기 Dec 03. 2021

불편한 꼬투리의 탄생

머식이,〈가족의 탄생〉, 김태용 감독


  불편함은 동떨어짐일 수도 동일시일 수도 있다. 불편함을 느낄 때는 그  근원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지 못했을 땐 경석처럼 애 먼 남의 차 사이드미러나 부숴버리게 된다.  

 왜곡된 분노의 근원을 찾는 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 근원이 오 랜 것일수록 복잡하게 얽히고 묻혀버려 이미 근원이란 의미조차 사라져  주변 모든 것에 물든 이후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질문만을 던져댈 수밖 에.


“내가 그런 걸 왜, 채현이한테 물어봐요? 이거, 내가 이렇게 한 건데, 이 걸 왜 채현이한테 물어봐요. 이거, 내가 그런 것 같은데 왜 채현이한테  물어봐요. 이걸 왜 채현이한테 물어보냐고! 왜!”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


  근원을 찾을 수 없는 분노는 잔인한 무력감과 의심을 심어준다. 이것이  경석이 어쩌면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누나에게, 채현에게 또는 모든  게 뒤섞인 어떤 것에게 가졌을 분노가 향하지 않아야 할 곳에 미안한 상 황을 초래하기까지의 과정이 된다.   

  하지만 모든 결핍과 분노의 결실이 어긋나게 향하지 않을 수 있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필자도 경석처럼 어릴 적 머리를 얻어맞곤 했지만 남 의 차를 부수는 어른이 되진 않았다.



- 회귀하는 자리  

  터미널에서 부모 잃은 아이를 찾아줬던 채현은 아이가 벤치에 홀로 앉 아있던 모습에서 어릴 적의 자신이 앉아 있던 벤치를 떠올린 것일까? 뚜 벅이로 홀로 집을 찾아와서는 두 엄마를 쟁취한 그때의 여정 말이다. 채 현이었기에 그 아이는 보호자에게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전에 채 현 본인이 앉아있기도 했던 곳이기에.   어릴 적의 필자도 채현 같은 어른에게 발견되었다면 좋았으리라는 생 각이 들어버렸다. 그랬다면 ‘아, 엄마가 날 드디어 버린 거구나!’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 콩 심은 데 콩 난다

  모순적이게도 어른이 되면 버려짐을 자처하기도 하는데 버려지지 않기  위해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분리한 선경도 마찬가지였다. 채워지 지도 않을 빈 통을 보고 있느니 내가 직접 통을 버려 버리면 간사하게도  꽤 멋들어진 착각은 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결핍에는 보상의 욕구가 따른다. 어릴 적 본인의 결핍에 최선을 다해  스스로 보답하는 듯 보였던 선경의 운동회 달리기는 필자에게 노란빛의  찬란한 가짜 추억까지 심어주는 듯했다. 경석이도 신나게 뛰었던가, 기 억에도 남지 않는다.


  선경은 엄마의 가방을 풀면서 비로소 어머니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  모습을 답습했다. 세월이 지난 후 침묵의 이해를 요구받고 받아들여야  하는 경석은 또 다른 비뚤어진 '선경'이 되었다.  엄마의 부재와 함께 어른이 되어버린 경석에게는 '구질구질한 엄마'만 이 남을 수밖에 없다.


“엄마는 구질구질한 게 아니라 정이 많으셨던 거야.”



- 형철의 안목

  의외로 형철의 안목은 믿어 볼 만하다. 형철은 미라에게 무신과 채현을  가족으로 이루어주었고 형철은 눈치껏 빠져준 셈이나 마찬가지다. 남은  셋은 더할 나위 없는 공동체를 이루었고 서로에게 필연이었다.


책임이 가지는 뜻과 무게를 아는 자들이야말로 책임을 입에 함부로 담 지 않는다. 형철은 나갔다. 버려진 건 형철뿐이다. 미라와 무신 그리고  채현은 이미 가족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책임질게.”


 “데려다주세요, 걔.” 

“무신 씨, 형철이 얘도 데리고 가세요. 너도 나가.”




필자의 여담- 떡볶이와 재떨이



  소신 발언을 하나 하자면, 나는 떡볶이가 싫다. 별거 아닌 취향이라지 만 학창 시절 모두가 모여 떡볶이를 먹는 시점엔 꽤 이슈가 되는 문제이 기도 했다. 이젠 떡볶이를 싫어하는 대한민국 인간을 보면 반가울 지경 인데 '국민 음식 떡볶이 배척자 클럽'이라도 결성할 걸 그랬다.   어쨌든, 구구절절 떡볶이 이론을 펼친 데에는 영화 도입부 미라의 분식 집 장면 때문이다. 학생들이 머리카락이 나왔다며 건넨 떡볶이를 너스레 를 떨며 건네받은 미라가 도로 떡볶이 조리대에 섞어버린 장면이다. 나 는 떡볶이에 대한 애착도 없거니와 살면서 먹어온 분식집 떡볶이가 그리  많진 않았기에 비위 조금 상하는 데에서 그칠 수 있었지만, 미라의 표정 이 잊히지 않는 걸 보면 가히 충격이었던 걸까. 미라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조금 정이 떨어졌었다. 그런데 영화 중반부 미라의 집, 미라 가 형철과 대화하며 떡꼬치를 손질하는데 위생장갑을 끼고 있는 게 아닌 가! 미라는 어쩌면 정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아마 세월이 더 지나 형철을 가차 없이 문전박대했던 때의 미라라면,  머리카락이 나온 떡볶이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미라가 돼 있었을 거 라고 믿는다

극 중 무신처럼 담배를 태우는 미라

  

  그리고 무신 씨는 저랑 삽시다. 전 재떨이도 챙겨줄게요. 공기 좋고 경 치 좋은 마당도 있으시면서 왜 실내 바닥에서 태우십니까.  물론 우리 집은 마당은 없지만요.  사실 저도 그 집 가족이 되고 싶었나 봐요.


물론 우리 집은 마당은 없지만요.  

사실 저도 그 집 가족이 되고 싶었나 봐요.

이전 03화 온전하지 못할 마주침에 대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