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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쓰기 Dec 03. 2021

비로소 마주하다

희주, 〈가족의 탄생〉, 김태용 감독

  선경은 언제나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녀는 취업 면접에 늦어도 박카스 몇 병과 타고난 너스레로 스스로 다시 면접 볼 기회를 만들어내는 당찬 사람이다. 이렇게 험한 세상 속 나 홀로 잘 버텨 나가고 있는 그녀 앞에, 어느 날 불청객이 찾아온다. 바로 그녀의 엄마 매자이다. 선경은 어린 시절 다른 남자와 바람나 자신과 아빠를 버린 매자를 여전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는 불쑥 자신을 찾아온 매자에게 쏘아붙인다. 


                                                “이상하네 왜 내가 궁금해졌을까?”



  어쩌면 가장 친밀한 사람이어야 했던 엄마가 남긴 상처는, 선경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선경은 언제나 엄마가 있는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취업을 하고 싶어 했으며, 자신을 찾아온 전 연인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대신 날 선 말들을 쏟아내며 혼자 마무리를 지어버렸다. 그 어떤 안정된 관계도 맺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은 오롯이 엄마 매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소식이 들려온다. 매자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선경의 발걸음은 자꾸 엄마에게 향하기 시작한다. 

  모든 인간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바로 ‘어떤 사람의 자녀로 태어나느냐’이다. 불공평하게도 이렇게 태어날 때부터 맺어진 인연은, 누군가에겐 끊어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움을 주기도 또 누군가에겐 유일하게 자신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족’이라는 인연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전제가 있다. 가족의 관계는 ‘질기다’는 것이다. 어쩌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아무리 끊고 싶어도 잘 끊어지지 않는 가족관계를 내포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질긴 인연.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선경의 이야기도 처음에는 그저 남보다도 못한 엄마를 끊어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자녀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엄마 매자는 선경에게 매번 돈을 꿔온 듯했으며, 항상 선경보다는 바람난 남자 운식과 그와의 아들인 경석을 먼저 챙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매자는 선경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매자는 어린 시절 선경이 집을 나간 이유도, 선경이 양손잡이였다는 사소한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 매자에게 선경은 ‘자신에 대해 진짜 모른다’며 삐뚤어진 분노를 표출하고, 어김없이 둘의 만남은 서로 감정의 골만 확인한 채 끝나버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경은 언제나 매자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한다. 아픈 자신 대신 경석의 유치원 운동회를 가달라는 엄마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선경은 기어코 다음날 유치원을 찾아간다. 그렇게 선경은 엄마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고 질긴 가족의 인연을 끊어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인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자는 세상을 떠나고 선경은 이복동생 경석과 덩그러니 남겨진다. 그런 선경에게 매자가 남긴 가방 하나. 그 안에는 선경과 매자의 사진, 어린 시절 선경이 갖고 놀던 인형 등 선경과 매자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빠짐없이 담겨있었다. 그제서야 엄마가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선경은 ‘엄마’를 부르짖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어쩌면 우리는 가족이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에, 가족을 타인처럼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일상 속에 가장 깊이 스며들어 있기에,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단정 지어버리는 것이다. 서로를 위하는 사랑의 마음은 같더라도 표현방식이 서툴 때 우리는 가족이기에 더 쉽게 오해하고 더 많이 상처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믿었던 선경은 매자가 남긴 가방을 열어봄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향한 엄마의 마음을 마주한다. 

  가깝고도 먼, 가족의 관계는 참 미묘하다. 가장 많은 것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큰 상처를 안길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관계 안에 서로를 위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면, 돌이킬 수 없어 보이더라도 언젠가 마음을 주는 가족이 된다. 선경은 함께 나누는 대화도, 시간도 아닌 매자의 가방을 통해 매자를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받아들임은 이미 세상을 떠난 매자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한 것이 아니기에 불안정한 맺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동안 매자가 선경에게 남겼던 수많은 상처는 여전히 선경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기에. 하지만 처음에 매자의 죽음을 무표정하게 받아들였던 선경이 가방을 열어보곤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선경은 어쩌면 외면할 수도 있었던 이복동생 경석에게 그토록 되기를 회피했던 가족이 되어준다. 불안정한 맺음이라고 할지언정 선경과 매자 두 사람은 질긴 ‘피’가 아닌 ‘사랑’으로 말미암아 가족이 되었다. 이후 훌쩍 커버린 경석은 누나 선경과의 대화에서 문득 이렇게 말한다. 엄마 매자는 ‘구질구질한 삶을 살았다’고. 그런 경석에게 선경은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구질구질한 게 아니라 정이 많으셨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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