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쓰기 Dec 04. 2021

이상적인 시나리오

성하, 〈원더〉, 스티븐 크보스키 감독

1.

〈원더〉는 보면서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영화다. 장애를 가진 주인공 어기에게는 여러 차례의 수술을 옆에서 함께 해 주고(그보다 먼저, 수술을 책임질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되고), 아이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응원을 보내는 가족이 있다. 친구들 앞에서 말실수를 하기는 했어도 모두가 어기를 외면했을 때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뒤늦게라도 사과하고 만회할 줄 아는 친구가 있다. 어기를 괴롭히던 무리의 아이들도 어기가 상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뒤따라와 구해준다. 이 영화에서 느끼게 되는 흐뭇함은 이렇게 많은 행운을 통해 얻은 것이기도 하다.


2.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을 읽었다. 엄마는 자신이 아이였을 때 받지 못한 것들을 아이는 모두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때로 엄마의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살로 인해 아이가 따돌림을 당하자 식단 조절을 도왔지만, 결국엔 엄마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이의 키가 훌쩍 컸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된 것이 그러했고, 나중엔 게임을 못 해서 놀림당했다는 사실이 그러했다. 아이들은 공부로 경쟁하지 않는다. 게임을 못 해서 따돌림을 당하고 게임의 승패 여부로 회장 선거에 나갈지 말지를 결정한다. 엄마에겐 그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엄마는 게임마저도 아이를 위해 배우기 시작했다.

  분명 이 소설에서도 〈원더〉에서만큼이나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해 주려 하는 엄마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의 지승에겐 어기만큼의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 아이를 위해 대신 게임을 배우기 시작한 엄마는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실력을 발견하고, 결국 아이를 괴롭히는 친구에게 맞서 대신 게임을 해 승리한다. 그런데 승리로 인한 기쁨도 잠시, 채팅창에 돌아온 것은 입에 담기조차 싫은 '부모 욕'이다. 대신 게임을 이겨준다고 해서 갑자기 아이를 놀렸던 친구들이 마음을 돌리는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3.

  둘 다 좋은 이야기이지만, 둘 다 온전히 마음을 주기는 쉽지 않다. 두 작품이 모두 아이가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이상적인 시나리오인 〈원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일일 것만 같고, 현실적인 시나리오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은 덮고 나면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전자는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가 명확하지만, 후자는 독자를 무방비 상태로 현실에 던져 놓는 느낌이다.

  분명 이야기가 지나치게 현실적일 필요는 없지만, 현실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않는 이야기는 당사자에게는 가닿지 못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진다. 영화평의 대부분은 〈원더〉가 얼마나 '착한' 영화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교훈적인 이야기는 분명 나에게도 감동과 만족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 만족감은 어디까지나 내가 (작품 속의 가족들이 그러했듯) 어기의 헬멧을 써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이라는 것도 안다. 이 영화가 현실의 어기들과 얼마나 가까울지, 혹은 어기 또래의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내가 느꼈던 만큼이나 울림을 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한편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독자에게 주인공의 경험의 아픔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작품은 어떨까?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은 화자가 주인공을 '당신'이라고 칭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독자가 누구든 '당신'의 입장이 되어 주인공이 느끼는 어려움을 보다 더 잘 체험할 수 있게 유도한다. 그리고 길지 않은 소설은 단번에 초등학생 사이의 따돌림, 게임 속 여성혐오 등의 문제들을 쏟아낸다. (아이가 직면하는 것만 이 정도다) 이 유쾌하지 않은 체험이 끝났을 때 독자는 현실의 심각성을 깨닫는 한편, '당신'이 아이의 욕설에 즉각 뭐라 말하지 못했던 것처럼 손쓸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혐오 발언에 일일이 대응하지 못했던 때와 유사하다. 과연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면 어느샌가 찾아온 무력감에 지배당한다. 이 소설이 만약 어떤 독자의 그런 무력감을 자극했다면, 소설은 어떤 문제를 상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거기서 어떤 행동을 유도하지는 못했다는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4.

  둘 중 어떤 방식이 낫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두 이야기 모두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두 이야기가 합의를 볼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에겐 그런 만능의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그저 비슷한 시기에 본 두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문제의식을 안겼다는 이야기만이 가능하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은 채로 사회 문제를 제시하는 것, 그러면서도 낙관하는 것이란 가능한가. 애초에 영화의 (또는 소설의) 목표가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인가. 고민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전 07화 아이가 어른이 될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