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쓰기 Dec 02. 2021

그림같은 해피엔딩

은서,〈행복〉, 아녜스 바르다 감독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공원의 풍경, 원색으로 예쁘게 칠해진 건물, 행복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연달아 등장하는 아름다운 장면에 감탄했다. ‘내가 1965년을 너무 과거라고 생각했구나’라는 반성과 함께 아름다운 영화를 즐기려고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림같은 풍경과는 다른 전개가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등장인물의 불륜행위나, 죽음에도 여전히 숲과 나무는 푸르르고 세상은 평화롭다. 이런 내러티브와 스타일의 결합은 영화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감정적인 빨강안정적인 파랑



  극 중 원색 의상을 입은 사람들, 원색의 건물, 가구가 많이 등장한다. 많은 색상이 등장하지만 주로 원색으로 대표되는 빨강, 파랑이 주를 이룬다. 빨강은 아이들의 옷, 에밀리, 테레즈의 옷, 글씨가 적힌 건물 등에 등장한다. 파랑은 목공소 직원들의 의상, 전화국 직원들의 의상, 부부의 침실 등에 등장한다. 색상의 반복을 통해 파랑은 사회적 안정, 빨강은 사적 감정을 다룬다. 그 예시로 프랑소와가 에밀리와 처음 만났을 때, 에밀리의 직장에서 주변 카페를 추천받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에밀리는 “카스텔 카페 말고 샤투 카페요”라고 말하고 바로 파란 간판의 카스텔 카페와 빨간 간판의 샤투 카페를 보여주는 쇼트가 이어진다. 둘은 결국 빨간 간판의 샤투 카페에서 만남을 가진다. 이는 자신의 안정적인 가정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보다는, 감정에 앞선 선택을 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어느 날은 에밀리가 빨간 옷을 입고 있고, 어느 날은 테레즈가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이를 통해 프랑소와가 정말로 두 사람 모두에게 사랑과 행복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을 각각 사랑했던 것과는 별개로 프랑소와는 테레즈가 맡고 있는(후에는 에밀리로 교체되는) 아내 역할의 사회적 위치를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근거로 가장 사적이어야 하는 부부의 침실에 파랑색이 사용된 것을 들겠다. 파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업무를 수행하는 목공소와 전화국과 다를 바 없이, 테레즈와 에밀리는 파란 벽 안에서 ‘아내’라는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파랑을 강조한 화면 사용은 테레즈가 죽는 장면에서도 부각된다. 프랑소와가 에밀리 혹은 테레즈와 성관계를 맺었을 거라 예상되는 장면은 많이 등장하지만 그 과정을 처음부터 보여주는 장면은 프랑소와가 테레즈에게 에밀리와의 관계를 털어놓는 장면이 유일하다.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던 테레즈는 가족관계에서 아내라는 역할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프랑소와에 의해 이 상태가 흐트러지게 된다. 옷이 벗겨진 상태에서 뭔가를 잠시 고민하다 테레즈는 사라지고, 파란 원피스를 입은 상태로 주검이 되어서 발견된다. 테레즈는 붕괴된 안정을 죽음으로 유지했다.     


결혼은 댄스 파트너 정하기가 아니다

  사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프랑소와를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테레즈와 아이들에게 상냥하고 (나름)가정적인 착한 남성처럼 그려지기 때문에 이 인물의 성품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프랑소와를 폴리아모리로 표현하며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을 표현하려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고민 끝에 프랑소와가 맺는 관계를 폴리아모리로 해석하면 안된다고 결론내렸다.      

  폴리아모리(polyamory, 다자간사랑)는 두 명 이상의 상대와 관계하는 것 혹은 그러한 관계에 대한 욕구를 의미한다. 여느 관계와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지속을 위해서는 소통과 정직,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프랑소와는 에밀리와 테레즈 두 사람 모두에게 무례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아내 테레즈에게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한 달간 만남을 지속했고, 프랑소와가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고있는 에밀리도 ‘아내와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짜증이 나’라고 말하며 이 다자 연애의 관계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프랑소와가 감정이나 욕구 측면에서 폴리아모리라고 말할 수는 있더라도 세 사람의 관계가 상호 간 예의와 존중을 기반으로 한 관계는 아니었다.  

  또 프랑소와는 목공소에서 직원들과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프랑소와는 자신을 ‘평생 한 사람에게 충실한다’, ‘충동적이지 않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과 반대로 테레즈에게 비밀로 한 채 에밀리와 관계를 맺었다. 관객들은 이를 모두 알고 있는 상태로 프랑소와의 말을 듣는다. 여기에서 느끼는 분노와 황당함은 감독이 프랑소와의 모순적인 면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한 것이 아닐까?

  프랑소와는 사랑과 결혼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테레즈가 죽은 후, 그를 그리워하지만 여전히 에밀리도 사랑하기에 결혼을 원했고, 아이들을 사랑해주길 바랐다. 사랑과 결혼은 동의어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사랑과는 다르게 결혼은 제도적 산물이다. 에밀리는 테레즈에게 침실을 함께 사용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과 법적 책임을 물려받는다. 아내의 자리는 공장의 부품이 다른 부품으로 대체되는 것처럼 쉽게 바꿔치기 된다. 이러한 ‘바꿔치기’는 한 가게에서 여러 사람이 파트너를 바꿔가며 춤추는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해당 장면은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는데, 가운데에 있는 큰 기둥을 중심으로 패닝되며 같은 공간을 비춘다. 이 장면에는 같은 구도로 파트너만 바뀌며 계속해서 춤을 추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프랑소와는 테레즈, 에밀리를 포함한 여러 여성과 춤을 추는데, 이처럼 쉽게 파트너가 바뀌는 모습은 테레즈가 사망한 뒤 쉽게 교체되어 버린 아내의 자리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이는 단지 프랑소와와 테레즈, 에밀리 뿐 아니라 사회의 음악에 맞추어, 규범적인 몸짓으로 춤을 추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테레즈가 엄마이자 아내로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과, 에밀리가 엄마이자 아내로 등장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소름끼치도록 비슷하다.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를 답습하기 위한 영화였다면 두 장면이 비슷하다는 것을 감추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르다는 이 장면을 똑같이 연출함으로써 강조하는 효과를 냈다.   


결혼 제도를 수호하는 신성한 여성

  이 영화의 여성은 모두 한 방향으로만 설정되어 있다. 아내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는 테레즈, 이를 이어받는 에밀리, 웨딩드레스를 준비하기 위해 테레즈를 찾아온 여성, 가족들과 같이 밥을 먹는 장면에서 아이에게 젖을 주기 위해 가슴을 드러내는 여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고 있는 신성한 여성으로 비추어진다. 사적인 고민, 불만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테레즈는 프랑소와가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됐다는 고백을 하자 처음에는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얼마 뒤 호수에 빠져 사망한다. 여기에서 테레즈가 죽은 이유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실족사인지 자살인지 드러나지 않기에 관객은 테레즈의 사망 원인을 추측해야만 한다. 관객이 죽음을 어떻게 추측하느냐에 따라 영화는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 실족사라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프랑소와를 이해했지만 실수로 죽게 되었다라고 읽어 테레즈가 정말 이해심 넘치고 순종적인 아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대로 자살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라고 말한 것 이면에 복잡한 심경이 들었고,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마음에 끝내 비극적인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나는 프랑소와의 행동이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테레즈 또한 남편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과연 프랑소와는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나와 같은 맥락으로 테레즈의 죽음을 이해했다면, 과연 에밀리에게 달려갈 수 있었을까.     

  테레즈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든, 프랑소와가 어떻게 받아들였든 상관없다. 프랑소와는 죽음에 슬퍼하지만 이내 회복하고 에밀리와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이것이 결말이다. 테레즈를 그리워한다지만 결국 행복한 가정의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는 프랑소와의 말과는 다르게 자신의 행복만 추구하던 현실적인 그만의 ‘해피엔딩’이었다.   



출처

 1. 애슐리 마델(2017), LGBT+ 첫걸음팀 이르다 옮김봄알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