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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이 May 02. 2022

나의 자존감 그리고 내면 아이






5월이 시작되는 지금


너무 춥지도 않고

너무 덥지도 않고




두툼하게 입고

얼굴만 따뜻하게 불멍 때리기 좋은 시기입니다.




이렇게 장작을 태울 일이 거의 없는데

남편 친구분께서 초대해주셔

느닷없이 밤에 애들 끌고 다녀왔습니다.




정말 불만 보며 왔네요



불을 멍하니 바라만 봐도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 짐을 느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갑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순간에도

저에게는 해야 할 일이 밀려있습니다.




집안일이라는 것이 

하지 않으면 계속 쌓이니까요.



아이들은 끊임없이 어지르고

그리고 계속 커가지요.



집안 청소 빨래 설거지 정리 

이 것들만 해도 하루가 금방 지나갑니다.


커가는 아이들 교육적으로 신경 써주어야 하고

수시로 부르니 놀아주어야 하고

요리도 해줘야 하고 

집안에 필요한 것들도 사서 채워놓아야 하고요


경제적인 것부터 집안 대소사 챙기는 것부터



 실천하고 싶은 책들을 읽고 글을 쓰는 것까지. 





시간이라는 것이

어떻게든 만들면 있고 

없다고 느끼면 또 한없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24시간 법칙' 


저와 신랑이 자주 하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이 주어지고



어떤 것을 잘 해내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어떤 것은 못하는 것이 있다고요.





이 말은 제가 지금처럼 지치거나

누군가가 마냥 부럽고 내가 못나 보일 때 떠올리곤 합니다.







저는

자존감이 굉장히 낮은 사람입니다.



시작은 아마 어릴 적 부터겠지요.



두 자매 중에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첫째인 언니와 많은 비교를 당했지요.

( 누구도 비교하지 않았는데 저 혼자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언니는 무엇이든 척척 잘 해냈습니다.


두 학년 차이였는데 



공부도 잘했고

발표도 잘했고

달리기도 미술도 피아노도 컴퓨터도


무엇이든 하는 것이라고는 척척 잘 해냈습니다.


욕심이 많았어요.


 아침 조회 시간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 중

언니는 항상 상을 받아왔습니다. 





그에 반해 저는

무엇이든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작은 시골마을 시골학교에서

제 이름으로 불리기보단

누구의 동생으로 알려졌지요.



언니보다 잘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었습니다.



아등바등 매번 실패할 뿐이고 비교될 뿐이었어요.



언니가 명문 대학교에 갔을 때도 그랬고

대학원에 가고 박사가 되고 유명한 곳에 유학을 가고 

최근에 좋은 조건의 사람과 결혼을 했을 때도. 




축하해 주지만



제 내면 아이는 아직도

어린 시절 비교와 질투의 대상으로

저 보다 잘 난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썩 좋지 않은 기분이 들지요.




부모님의 언니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당연히 높으셨고

지인에게 자랑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축하받는 공간.




그 공간에 있기 싫어  방 한구석에 들어가 울었던 기억은 잊히지도 않습니다. 









저는 아주 어릴 적 한 3-4살부터

많이도 울었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일하시느라 항상 바쁘셨고




일하시는 곳에 울면서 어두운 밭길을 걸어 찾아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습니다.





밝고 밝았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언니에 대한 낮은 자존감은 관계를 맺는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도 이어졌고

항상 비교하고 자신감 없고 내성적인 저만 기억이 나거든요




초등학교 6학년 내내 그러하였고

중학교 때는 심한 사춘기를 겪으며 더 동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중간중간

활기참을 찾다가도

이상하게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다시 자존감이 낮은 저로 되돌아오곤 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절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저는요 

진심으로  

이런 제가 안쓰럽습니다. 




아직도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왜 누군가의 잘됨이 나의 불행이 될까요?





제 내면 아이는 언제쯤 자존감을 되찾고 

어떤 비교와 자랑에도 괜찮아. 넌 지금 행복해.

라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에게 책 육아는

저처럼 크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크지 못한 나.

비교당하며 행복하지 못한 나.

공부 못했던 나

사회성도 좋지 못했던 나

못나 보이기만 한 나






이런 불행한 아이로 크지 않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자존감이 강한 아이로

커주길 바라는 그 마음 하나였습니다. 






아이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며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만들어 주고

비비며 속삭이며 '넌 사랑받고 있어'라며

제 몸을 다 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건강히 잘 커주었습니다.


여기서 잘은 여전히 제 곁에서 함께 별 탈 없이 지내준 다는 의미지요.







책을 그렇게 읽어 줬는데 공부를 못해?

그렇게 함께하며 몸을 내줬는데 엄마한테 반항해?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다 주며 키웠는데

그러면 사회성도 좋아진다고 했는데 

사회성도 나빠?




유전자는 어쩔 수 없고

내 내면 아이는 대물림이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


저는 무너집니다.





어 쩔 수 없 는 건 가 ?















이렇게 제 내면 아이를 꺼내 봅니다.


슬퍼지지요.





그리고 이내 마음을 고쳐 잡아 봅니다. 










괜찮아,

너도 충분히 사랑스럽단다.

그리고 사랑받고 있어






위의 24시간 법칙처럼



전 분명 그 누구가 갖지 못한, 하지 못한 것을 해냈을 겁니다.



어찌 되었든 주어진 24시간 묵묵히 살아왔잖아요.




누군가와 비교하느라 행복하진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저는 '운'이라 생각되는 것을 달고 다녔습니다. 





(시험을 봐서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시절) 중학교 선생님이 안된다고 하셨지만 

원하는 고등학교에 낮은 성적으로라도 붙었고요.

지방 전문대나 갈 것이라 했던 부모님의 기대에 부흥했어야 하는데 

공부한 것에 비해 좋은 대학교에 진학했고

하고 싶었던 아이들을 가르치는 꿈도 이뤘습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건강하게만 태어나 달라했던 아이들은 건강히 태어나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첫 아이는 아들이면 둘째는 딸이면 좋겠다 했는데.


그리고 너무 예쁜 내 아이의 유아시절을 

제 품 안에서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또한 해냈습니다. 



아이를 잘 키워내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로 살았으면 했는데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고 있지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데

매일 감사할 일들이 생깁니다.

 









부모님의 살결을 비비지 못하고 큰 

제 내면 아이를 들어다 봅니다.



누군가와 비교하느라 힘들게 살아온

제 내면 아이를 들어다 봅니다.




토닥토닥.



괜찮다고 말해줍니다. 



앞으로도

너에게 '운'은 항상 함께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요.



충분히 넌 예쁘고 사랑스럽다고요. 





저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살고 싶은

저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엄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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