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주의 아버지는 그녀를 다른 자녀와 마찬가지로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했지만, 그녀 의 어머니는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병원에 자주 입원하거나 보조 기를 몸에 하고 다녀야 했던 김희주가 너무 안쓰러워서 공부를 전혀 시키지 않았고, 그녀 는 한글을 읽지 못한 채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인문학자인 김희주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책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녀는 기억한다. “사람 구실하면서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의사로부터 듣게 된 김희주는 9세에 독일에 있 는 기숙 여학교에 보내진다.
나의 담당 의사선생님 연구실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당시 서울대병원 교수 연구실 은 명패가 한자로 적혀 있었는데 나는 한자를 읽을 수가 없어서 복도에서 길을 잃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찾으러 오셨고, 담당 의사선생님 방문 앞으로 가서 명패에 적힌 한자를 가르쳐 주셨다. 그곳에는 엄마, 아빠도 같이 있었는데, 의사선생님은 아이가 학교에 다니 기가 어려우면 외국에 빨리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가 한국에서는 사람 구실하면서 살기 어렵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혼자서 독일에 있는 기숙사 학교에 보내졌다. 엄마, 아빠는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나에게 자주 말했다. 그것은 어른이 되면 내가 나을 것이고, 그러면 밖에서 친구들과 뛰어놀 수 있고, 수술한 상처도 엄마, 아 빠가 다 없애줄 것이고, 더 이상 아프지 않고,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뜻 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나에게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