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퇴근하고 보니, 며칠 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한 책이 집에 와있었다. 아내와 책 이야기를 하던 중 아내가 내게 말했다. **씨, 그런 종류의 책을 왜 읽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다고 하였다. 책 제목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었다. 한참 후 재밌어서 읽는 거냐고, 아니면 지루한데도 억지로 참으면서 읽냐고 또 물어본다. 난 사실 당황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조금은 고민이 되었다. 내가 그런 종류의 책을 왜 읽고 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아내에게 설명을 해줄 때 어떻게 해야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니 뚜렷한 답을 찾기가 힘들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왜 특정 장르의 글을 읽는지 생각을 깊게 해본진 않았다.
독서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는 책을 고른다는 게 많이 힘들었고, 어떻게 골라야 할지도 잘 알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독서를 하다 보니 항상 읽어야 할 책 리스트들이 나의 머릿속과 독서노트에 남겨놓고 그다음 책을 읽곤 한다. 사실 마음만큼 빨리 못 읽어서 문제다. 읽어야 할 리스트가 읽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계속 책을 읽다 보면 읽고 싶은 책 리스트들이 계속 생겨나기 때문이다. 처음엔 가볍고 흥미 위주의 책을 읽었고, 계속 책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은 지루하고 생각을 많이 해야 되는 쪽으로 손이 가게 되었다. 독서를 많이 안 하던 시절에 누군가 어려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면, 필자 또한 왜 저런 종류의 책을 볼까 의문점이 들기도 했다.
모든 책은 결국 통한다는 말처럼 , 처음에는 특정 장르의 책을 읽다가도 계속 꾸준히 읽다 보면 여러 장르의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초반에는 전작주의처럼 특정 저자의 책을 내리읽은 적도 있고, 특정 분야의 책만 몇 달 동안 읽은 적도 있다. 독서법에 소개된 책 읽는 방법을 보면 책을 편식하지 마라고 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나의 관심과 맞지 않는 책이지만 골고루 읽기도 했다.
그렇게 읽다 보니까 채워지지 않은 물을 담은 그릇으로 그 물을 양동이에 옮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동이에 담는 행위를 하는 만큼 양동이에 물이 많이 채워지지 않았다. 당연히 그릇에 물이 가득 채워지지 않은 것을 옮기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정 분야별 난이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독자의 배경지식과 관심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분야는 쉽지만, 어느 특정분야는 어렵게 다가올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가 쌓여서 넘치고 나면 다른 분야의 독서를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이 가지 않은 책은 나중에 읽기로 생각했다. 사실 마음이 가지 않은 책의 분야는 나의 배경지식이 없거나 빈약한 분야였다. 글로 이해하지만 머리와 마음으로 이해하기엔 시간이 더 필요한 책이었다. 매년 1월에는 1년에 4~5가지 정도의 분야를 정해 책 읽기를 목표로 잡고 읽기 시작한다. 당연히 관심이 가는 분야의 책을 읽다 보니까 재미와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렇게 읽다 보니까 관심 밖이었던 분야의 책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누가 소개해준 것도, 나 스스로 이제는 좀 더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 볼까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책 읽기 욕구가 그 분야까지 미치고 있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다 때가 되면 이루어지듯이, 단기간의 경쟁이나 보여주기 책 읽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읽는다.
질문의 내용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장르를 왜 읽는지 물어본 거였다. 필자의 대답을 이렇게 글로 적었던 내용을 아내에게 말해 준다면 듣는 입장에서 괴로울 것이다. 내면적인 요소를 외면적인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보이지 않는 필자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기가 한 번씩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독서라는 것 자체가 직접 경험을 간접화하는 것이라지만, 사실 독서는 마음의 직접 울림이다. 독서를 통해 나의 내면의 울림이 아내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서야 아내의 질문에 명료하게 답해 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