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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 숲 Feb 21. 2022

커피의 취향

커피가 기억하는 시간

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던 나는 점심시간이면 친구들과 혹은 선배들과 학생 식당에 우르르 몰려가 2인분이나 3인분의 밥과 반찬을 시켜 놓고 여럿이서 나눠 먹곤 했다. 그 당시 우리는 대부분 주머니 사정이 빠듯했고 조금씩 있는 돈을 모아서 점심을 나눠 먹는 게 일상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면 학생회실 건물 안에 있던 커피 자판기에 100원짜리 동전을 집어 넣어 커피를 뽑아 먹곤 했다. 그래서 내 기억 속 첫 번째 커피는 자판기 커피의 향기로 남아 있다. 종이컵에 든 커피를 들고 학생회실로 가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거나 회의를 하거나 대자보를 쓰면서 달달함이 입에 감도는 커피를  마시곤 했다.


정치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암울했던 80년대 후반에 대학생이 되어 치열하게 그 시대를 고민하고 살았던 내 20대 초반 일상생활 곳곳에는 언제나 자판기 커피가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았는데 그 시간들로부터 멀어진 지금에서야 알겠다. 내 생활 속에서 커피는 그렇게 일상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던 친구들이나 선배들과 함께였다는 것을, 그리고 민주주의나 열린 세상에 대한 열망과 함께였다는 것을.



학원으로 출근해 수업 준비를 하면서 내가 맨 처음 하는 일은 커피를 타서 마시는 일이었다. 논술 수업 준비를 할 때는 책을 읽거나 아이들과 토론할 내용을 생각해 보거나 프린트를 하면서 커피를 마셨다. 시험기간에는 학교마다 범위가 다르고 책도 달라 시험에 대비할 자료를 만들면서 커피를 홀짝거렸다. 학원 선생님들과 일할 때는 선생님들과 함께, 남편과 둘이 학원을 운영할 때는 남편과 같이 일을 시작하면서 혹은 학원 일을 의논하면서 커피를 마시곤 했다.


세월이 지나 직장을 잡았다고 일부러 찾아온, 성인이 된 옛날 제자들에게도 커피를 타 주고 함께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시험 기간에는 밤 12시 넘어서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며 부대꼈던 시간들이 돌아보니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다고, 오래된 추억을 공유하며 즐겁게 얘기했던, 고맙고 보람 있는 기억들도 있다.  


먹고살기 위해 학원 일을 하면서 보낸 20여 년의 시간 동안 믹스 커피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의 일상이었다. 늦은 밤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더구나 시험 기간에는 주말도 반납하고 암기 과목까지 봐주면서 아이들의 미래를 밝히고 싶었던 그 시간들, 노력하며 분투했던 그 시간들을 나는 커피를 마시며 버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커피와 설탕과 프림의 적당한 비율이 만들어내는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맛, 믹스커피는 삼십 대와 사십 대의 나에게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이고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안이자 즐거움이었다.




나이 마흔여덟에 로마를 혼자 여행하면서 아침과 저녁은 한인 민박집에서 해결했지만 점심은 어딘가에서 사 먹어야 했다. 포폴로 광장에서 코르소 거리를 따라 걷다가 배가 고파져 작은 골목길로 들어선 적이 있다. 골목길을 한참 걸어서 빵과 음료를 파는 카페에 들어가 크루아상과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깊은 골목길이라 관광객은 없고 작은 동네 카페 분위기였다.


내가 앉아서 점심을 먹는 와중에 로마인들이 들락날락거렸다. 그들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하더니 설탕을 잔뜩 넣고 주인과 몇 마디 주고받으며 잠깐 동안 서서 마시고는 그라찌에, 하면서 나가곤 했다. 그 당시 그 골목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 가격은 1유로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누구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아 누구든지 즐길 수 있는 문턱이 아주 낮은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였다.


나도 이탈리아에 왔으니 에스프레소 한 잔은 먹어 보아야지, 생각하고는 바티칸 박물관 근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해 그들처럼 설탕을 잔뜩 넣고 먹어 보았다. 처음 맛본 에스프레소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다디단 설탕이 듬뿍 들어가 쓴 맛을 중화시키면서 기분 좋은 커피 향이 느껴졌다. 앙증맞게 작은 에스프레소 잔에  모금이나 모금이면 끝나는데 그건 이탈리아라는 여행지가 주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로마에 머물면서 묵었던 한인 민박집 근처에는 규모가 제법 큰 이탈리안 마트가 있었다. 귀국을 앞두고 마트에 가서 초콜릿과 과자를 고르고 일리 커피와 가정용 에스프레소 기구 비알레띠를 구입했다. 그때 사 가지고 온 비알레띠를 애용한 커피는 내가 원두커피에 맛을 들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설탕도 프림도 없이 따듯한 물을 가득 부은 커피 원두로 느낄 수 있는 맛은 구수하고 씁쓰레하면서 담백했다.




요즘 나는 생두를 구입해 집에서 커피를 만들어 마신다. 에티오피아 농부들이 재배한 커피콩은 채도가 낮은 녹색이고 생두를 코에 가까이 가져가니 조리하지 않은 식물에서 맡을 수 있는 날비린내가 난다.

나는 생두를 적당량 덜어 프라이팬에 넣고 로스팅한다. 녹색 빛깔 생두가 갈색이 되고 고동색이 되고 다시 검고동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원두 껍질이 타다닥거리며 벗겨진다. 열을 먹은 원두가 빛깔을 바꾸는 변신과정에서 커피 특유의 고소하면서 세련된 향이 올라온다. 나무주걱으로 20~30분 계속 저어줘야 하는 수고가 들어가지만 커피를 볶는 과정이 재미있다. 생두가 로스팅되면서 빛깔이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신기하고 불을 만나 그윽하게 시작해 점점 진한 향을 맡을 수 있는 그 과정도 즐겁다.


젊은 시절에는 일이 많아서 그랬는지 시간적 여유가 없어 그랬는지  항상 편리한 커피를 즐겼고 입에 달고 부드러운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 건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내 노동력과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일이 즐거움이 되었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직접 재배하고 생산하는 일은 여건상 할 수 없지만 들일 수 있는 최대한의 내 노동력을 들여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은 자연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가 닿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날것 그대로의 생두 향을 맡으면서 불의 작용과 프라이팬과 나무주걱의 도움과 내 팔의 노동력이 합치되어 불의 입김을 담은 그윽하고 구수한 풍미를 지닌 원두로 거듭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는 뿌듯함이 있다.


더구나 입으로 느껴지는 그 맛은 알싸하면서 구수하고도 깔끔하다. 원두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심플하면서 커피 본연의 성질을 느낄 수 있는 맛이다.


진하지 않고 담박하게,

혼자 혹은 누군가와 함께,

위로를 위해 쉼을 위해 혹은 생기를 위해

나는 오늘도 커피를 만다.

그리고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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