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나무들

창덕궁 나들이

by 밝은 숲

며칠 전 미국에 사는 조카가 한국에 왔다. 남동생 가족은 15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일곱 살이었던 큰 조카가 그 사이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교환학생을 신청한 것이다. 그런 조카를 만나기 위해 나는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안국역에서 만난 우리는 점심을 먹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미국 역사를 배우고 자랐을 조카에게 우리의 고궁을 보여주고 싶었다. 2월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뜻해 고궁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지척인 창덕궁.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한국에 들어오지 못해 고궁을 처음 본 조카는 돈화문을 바라보며 감탄을 했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지어진 처음 보는 조선의 궁궐 정문이 아름다웠나 보다.


돈화문을 지나 궁 안으로 들어서니 손질이 잘 된 나무들과 단아한 전각들, 너른 마당이 여유롭고 정갈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창덕궁이 나는 반가웠다.

창덕궁의 인정문에서 바라 본 인정전

경복궁의 위엄이 근정전에 있듯이 창덕궁의 위엄은 인정전에 있다. 인정문을 들어서면 창덕궁의 정전인 웅장한 인정전이 보인다. 왕이 즉위식을 거행하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나라의 위엄을 보이고 왕의 권위를 보여줄 만큼의 적당한 위엄과 알맞은 권위가 있. 계석이 놓여 있는 너른 돌마당에서 바라본 인정전은 기품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모든 궁궐이 불에 타 광해군 때 다시 지어졌고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한 궁으로 알려져 있다.

후원 가는 길

창덕궁의 하이라이트는 왕실 정원으로 불리는 후원이다. 후원은 창덕궁에서 60%를 차지할 만큼 넓고 비중 있는 곳이다. 후원으로 오르는 길 양쪽에는 기와를 얹은 돌담이 운치를 더했고 마치 숲 속에 들어온 듯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후원의 주인은 인공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였다. 자연 속에 정자가 자연 속에 건축물이 단아하거나 겸손하게 섞여 있다. 또한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했다는 말이 실감 났다.


후원을 관람하면서 제일 먼저 보이는 연못이 부용지인데 연못을 중심으로 부용정과 영화정, 언덕배기에 2층으로 지어진 주합루도 자연 속에 어우러져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변

창덕궁의 후원은 마치 숲 속과 같아서 골짜기마다 연못이 있고 아담한 정자가 만들어져 있다. 애련지와 애련정이 있고 관람지와 관람정, 존덕정이 있다. 각각의 정자와 건축물들은 왕실의 역사를 아우르는 만큼 모양과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창덕궁은 나무로 풍성했다. 늘푸른 상록수들, 산사나무와 밤나무, 뽕나무와 팥배나무, 산수유나무와 화살나무, 느티나무와 감나무 등이 궁 곳곳에 심어져 있다. 상록수 사이사이로 잎 떨어진 낙엽수의 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데 오래된 나무들이 가지고 있는 오랜 세월의 내공 때문일까, 앙상하기보다는 강건한 기상이 느껴진다.

창덕궁의 회화나무

조선 시대 신하들의 궁궐 출입문이었던 금호문 근처에는 300살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서 있다기보다는 옆으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이 회화나무는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을 때 심어진 것이라고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회화나무의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썩어서 비어진 것은 1762년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여름날 8일 동안 뒤주 속에 갇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 사도세자의 비극을 지켜본 탓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왕조의 비극적인 사건을 휘어지고 비틀린 채 살아 견딘 듯 회화나무의 존은 보는 것만으로도 참담하다. 그래서일까, 회화나무가 봄마다 연둣빛 이파리를 피워 내기를 바게 된다.


창덕궁에서 가장 오래된 향나무

창덕궁 후원 관람 일정 중 마지막 코스는 800살 가까운 향나무이다. 덕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알려진 향나무는 고려 시대 때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래된 나이만큼이나 파가 많아 부러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푸른 잎을 간직하고 있다.


향나무는 동서로 왕성하게 자라난 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는데 조선 왕조의 영욕을 보고 일제 치하, 한국전쟁이라는 고난의 현대사를 겪고도 살아남은 향나무가 미래에도 잘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창덕궁 관람을 마치니 겨울 햇살이 석양빛으로 물들어간다. 우리 것에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 하는 조카와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오는 길, 이번 창덕궁 여행은 겨울을 잘 견디고 봄을 준비하는 오래된 고목들의 의연함으로 기억될 것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