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선물
동생들과 나는 2주에 한 번씩 줌으로 만나고 있다. 나는 안부를 전하면서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들어온 조카 만난 이야기를 했다.
조카가 어린 시절 아빠의 억압과 권위적인 태도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것, 하지만 이제는 이민자의 가장으로 네 식구를 책임져야 했던 아빠의 고통을 이해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조카의 아빠인 남동생은 자신이 겪었던 힘든 스트레스를 어린 아들에게 풀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이야길 듣는데 나는 우리 오남매가 어릴 적 아버지의 억압과 권위에 짓눌려 지낸 흔적이 우리 아이들에게 대물림되고 있었구나, 싶어서 안타까웠다. 나 또한 딸아이에게 마찬가지였다는 자기반성과 함께 말이다.
그걸 극복해 보려고 나는 마흔 살 즈음 에세이 한 편을 쓴 적이 있다. 아버지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려 노력했는데 동생들도 각자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썼던 에세이 '화해'를 동생들에게 보여 주었다. 다음은 '화해'의 내용이다.
“병원 응급실이라구요?”
그날 밤, 전화를 받는 엄마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얼굴은 불안해 보였다. 아버지가 병원 응급실에 있으니 모셔 가라는 전화였다. 건강하신 아버지가 갑자기 병원이라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엄마와 나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에 누워 계신 아버지는 술기운 때문에 몸을 잘 가누지 못하셨다. 팔에는 링거 주사 바늘이 꽂혀 있고 왼쪽 뺨은 찰과상을 입어서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팔과 다리에도 넘어져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병원 측 설명으로는 길가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지나가던 행인이 119 구조대에 신고해 응급실에 모셔 왔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서 얼굴과 몸에 상처가 났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술 취한 후의 일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셨다. 가까운 바다에 놀러 가자는 자식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가게를 지키신다던 아버지는 하루 종일 술을 드신 모양이었다. 나는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다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답답했다. 여전히 아버지는 술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계신 것이다.
요즘에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술을 자주 드셨다. 술을 시작하면 적게는 일주일, 길게는 열흘을 꼬박 술만 드셨다. 그 시간 동안 아버지는 눈만 뜨면 술을 찾아 밖으로 돌아다녔다. 아버지가 술과 함께 보내는 날들이 우리 가족에게는 일상의 평화가 서서히 깨져 가는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평소에 아버지는 고상한 클래식을 듣거나 올드 팝, 샹송, 칸초네를 즐겨 들으셨다.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서 새벽마다 등산을 다니고 쑥뜸과 명상을 했다. 독서를 취미로 삼고 뉴스를 보면서 잘못되어 가는 정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가게에 손님이 들면 물건 파는 일보다 그들의 건강에 대한 조언과 병에 대한 치유법을 설명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래서 평소 때의 아버지 모습을 그려 보면 냉철함과 박식함, 당당함이 떠오른다.
그런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딴 사람이 되었다. 눈동자는 풀려 있고 팔다리는 흐느적거리고 중심을 못 잡아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거리에서 마주치는 일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는 두 얼굴을 가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술버릇 때문에 엄마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엄마는 아버지의 술버릇을 고쳐 보려고 무던히도 애쓰셨다. 하루만 드시라고 설득도 하고 동네 창피하다고 푸념도 해 보고 계속되면 집을 나가겠다고 엄포도 놓으시곤 했다. 그렇지만 술에 집중하는 아버지의 그날들은 아무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도 말릴 수도 없었다. 어른이 되어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된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술버릇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정신이 좀 드시나 보았다. 술기운이 많이 가신 목소리로 4년 반 만에 술을 먹었노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자면 4년 반 동안 마시고 싶은 술을 참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는 아버지의 술버릇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드시고 싶은 술을 4년 반 동안 참고 또 참으신 걸까. 그러다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불가항력, 혹은 참기 어려운 스트레스가 걷잡을 수 없이 몰려와 술을 부른 걸까.
어느 결엔가 나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아버지는 물질적으로는 풍족했으나 정신적으로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아버지 없는 유년 시절은 마음에 결핍감과 우울함을 남겼을 터이다. 부유한 친척의 도움으로 대학을 마치고 신문사 기자가 되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두고 시골에 낙향해 포목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결혼해 살면서 슬하에 오남매를 두셨다. 장사를 하면서도 이윤을 크게 남기는 일은 불편해하고 자존심이 강해서 어딜 가나 신세 지기보다는 돈을 쓰는 쪽을 택했다. 자식들은 커 가고 돈 쓸 일은 많아지고 돈 벌 일은 별로 없어졌다. 쉬는 날도 없이 일 년 내내 가게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 상황은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삶의 허무함과 우울함과 비관성을 참을 수 없을 때면 아버지는 술을 찾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잊고 싶어서 혹은 현실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기운이 다 소진될 때까지 술을 드셨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꾸었을 꿈,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자괴감과 열패감, 현실과 이상의 부조화에서 오는 좌절감, 인생에 대한 허무감, 물질만능주의 세상에 대한 냉소, 그것들이 모두 모여 아버지를 힘들 게 한 건 아닐까. 그 감정과 느낌들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가슴속에 남아 있어 술이 된 건 아닐까.
나는 불현듯 아버지의 술버릇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고 싶어 진다. 술에 취한 아버지 때문에 서글퍼한 어린 시절의 내 추억과도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싶어 진다. 이제는 방황을 마치고 안방에 고요히 잠들어 계신 아버지와 진정한 화해를 나누고 싶다.
남동생들은 ‘화해‘를 읽고 눈물이 나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오직 자신의 노동력으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외국에서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상황이 그 시절 아버지의 짐과 맞닿아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아버지의 억압과 독재로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의 영혼이 떠올라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듯이 동생들도 자신의 어린 영혼과 만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앞세대인 아버지의 짐과 인생을 이해하듯이 후세대인 자식들이 우리의 허물과 상처를 이해하려는 마음이어서 참 대견하고 다행이다.
정서적으로 불우했던 어린 시절 우리의 상처가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면서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한 상처가 결국 아버지 자신의 상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그리고 동생들과 아버지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게 돼 감사하다.
멀리 떨어져 살지만 동생들과 줌으로 만나고 대화하고 나눌 수 있는 것은 이제는 세상에 계시지 않아서 그리움으로 남은 아버지가 주는 화해의 선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